백마강에는 낙화암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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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45
  • 한지윤
  • 승인 2020.06.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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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거둔 뒤의 고구려의 태도이옵니다. 고구려는 거센 나라이옵니다. 싸움을 즐기는 나라이옵니다. 전에도 수없이 우리 백제를 침공해 왔던 나라이옵고요.”
“……”
“그 고구려가 승리를 거둔 뒤, 힘을 합했던 의리를 저버리고, 승리의 기세를 그대로 우리 백제를 치는 일에 쓰는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아니 틀림없이 우리 백제를 침공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우리 백제와 힘을 합하자는 추파(秋波)이 옵니다. 고구려는 강대한 나라이옵니다. 그들 혼자의 힘으로도 능히 낙랑의 여러 작은 나라를 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백제에게 힘을 합하자고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뚜렷한 고구려의 농간입니다. 저들이 낙랑의 조그만 나라를 치고 있을 때, 우리 백제가 고구려로 쳐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그들 고구려에 없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막고, 한편으로는 우리 백제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싸움터로 끌어내려는 계책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로선 분명 일석이조의 이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낙랑의 여러 작은 나라를 없앤 뒤엔, 우리 백제로 쳐들어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 우리 백제의 힘이 대 고구려를 당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그들이니까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왕비의 말이었다. 전에 고구려가 하던 일로 보아 그런 태도로 나올는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왕이었다. 가벼워졌던 왕의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그럴 법한 말이오.”
왕의 말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럴 법한 일이 아니오라, 반드시 그렇게 나올 고구려이옵니다. 그것이 싸움을 즐기고 영토의 욕심이 많은 고구려의 야심이옵니다.”
“음.”
왕의 목소리가 침통해졌다.
“아녀자의 몸으로 국사를 논란하는 바는 아니옵니다만, 백제를 위하는 백제 사람이기에 올리는 말씀이옵니다.”
“과인이 어찌 비의 마음을 모르리오. 꺼리지 말고 생각되는 바 일을 말해주오. 과인은 비의 총명을 믿고 의지하는 바 크오.”
“우리 백제가 고구려의 요청을 듣고자 함은, 낙랑의 여러 나라를 치고자 함보다 고구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옵니까?”
너무 당돌한 비의 말이었다. 그러나 왕은 이 왕비 보과부인이 당돌함에 노여움을 느끼지 않았다.
왕비 보과부인을 끔찍이 여기는 까닭이기도 하고, 비의 총명을 지나치리만큼 믿는 때문이기도 했다.
총명한 보과부인은 왕의 이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돌한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 점도 없지는 않소.”
“그럴진대 고구려의 청을 물리침이 옮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이래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을는지 모르는 일이고 저래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게 될 일이라면, 나라의 위신도 세우고, 또 농간에 넘어가 쓸데없는 군사의 손실을 당하느니보다 고구려의 요청을 점잖게 거절함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고구려를 돕고자 당하는 손실을, 고구려의 침공을 막는 싸움에 씀이 백제를 위해 떳떳하지 않겠사옵니까.”

정말 그럴 듯한 능변이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지 않고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왕비의 총명한 구변이었다.
왕비 보과부인의 말을 반박할 아무 말도 없었거니와, 이유도 없었다.
“고맙소, 비.”
왕은 진정 왕비의 지혜를 고맙게 여겼다.
무거웠던 마음이 다시 후련해지며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 왕은, 왕비의 보드라운 손을 잡으며,
“비 아니었던들 과인이 큰 실수를 했을 뻔했소.”
하고 못내 기뻐했다.
고구려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튿날 고구려 사신들은 책계왕의 서찰을 받고 깜짝 놀랐다. 백제 책계왕이 고구려의 청함을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구려를 두렵게 여기진 않더라도, 한족의 세력을 없애는 일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로서도 바라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고구려의 뜻을 알고 기꺼이 군사의 힘을 합해주리라 여겼고 믿었었다.
그런데, 백제 책계왕은 백제의 힘이 그에 미치지 않는다는 간단한 이유를 붙여 깨끗이 거절을 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백제의 모든 신하들도 하나같이 놀라거늘, 더욱 고구려 사신들임에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괘씸한 마음을 지닌 채, 고구려로 돌아갈 밖에 없는 고구려 사신들이었다.
“신 양걸은 대왕마마께 아뢰오.”
내두좌평 양걸이 고구려 사신을 돌려보낸 뒤 왕 앞에 엎드리며, 만조백관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과인의 처단이 옳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모양이지.”
왕은 양걸의 하려는 말을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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