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68
상태바
백마강에는 낙화암 -68
  • 한지윤
  • 승인 2020.12.02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왕포(大王浦)ㅡ이름만 들어도 임금의 놀이터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이곳은 사비수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포구, 선왕 무왕(武王)이 이곳에 화려한 놀이터를 꾸며 놓으면서부터 임금이 뻔질나게 다닌다고 대왕포란 이름을 달게 된 것이다.
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대왕포의 주인이 된 의자왕은 사흘이 멀다 하고 이곳에 와서 큰 잔치를 벌였다. 나라야 어떻게 되든 지금 놀지 않고 언제 놀랴 라는 의자왕이었다.
“밤낮 저렇게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내니 나라꼴이 어떻게 된담?”
충직한 신하들은 왕의 음란한 생활에 근심이 태산 같았으며 백성들의 원성도 차츰 높아갔다. 그러나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날도 두 무릎 위에 궁녀 하나씩 앉혀 놓고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넙적넙적 받아 마시면서 흥타령을 부르고 있었다. 좌평의 벼슬로 있는 자들도 모두 다 궁녀 하나씩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갖은 추태를 다 부리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대신 한 사람이 나타나 무서운 눈초리로 좌중을 휙 둘러보더니 왕 앞에 넙죽 엎드렸다.
“대왕, 어서 환궁하시오.”
“무슨 일이요?”
왕의 목소리는 벌써 거칠어졌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돌아왔소. 이제 당나라는 백제와 끊고 신라와 손을 잡을 기미가 뚜렷하니 사직이 위태롭소. 놀이를 삼가고 정사에 정력하시오.”
성충은 더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직언하였다. 드디어 왕의 노기는 화신처럼 터졌다.

“아니, 경은 남의 술자리에 뛰어들어 흥을 돋우지는 못할망정 흥을 깨뜨리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래 경의 눈에는 과인이 술 한잔 마시는 것 때문에 사직이 위태해 보이는가? 괘씸하도다. 저 늙은 것을 어서 옥에 쳐 넣어라!”
왕의 불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성충을 끌고 나가려 하였다.
“잠깐만!”
성충은 무사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다시 한 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대왕, 예로부터 양약이 입에 쓰고 충언이 귀에 거슬린다했은즉 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시오. 신라와 당나라가 손을 잡으면 백제 사직이 위태롭소. 어서 바삐 강한 군사를 기르고 선손을 써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소.”
“듣기 싫어! 얘들아, 빨리 끌어내다 옥에 가두어라!”
의자왕은 끝내 성충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그리고도 마음이 차지 않아 밥 한술,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말리워 죽일 작정이었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이 국난의 관두에 충신을 옥에 가두다니!”
성충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좌평 흥수는 부랴부랴 왕을 찾아갔다.
“안될 일이요. 성좌평은 지모가 출중하고 심중에 사직밖에 없는 충신이요. 나라의 흥망성쇠가 눈 앞에 닥쳤는데 충신을 하옥하다니, 안될 일이요.”
흥수는 성충을 석방해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간하였으나 의자왕은 역시 듣기 않고 흥수를 물리쳤다.

“듣기 싫소. 말공부로 나라가 흥해졌단 말은 못 들었소. 시끄럽소. 어서 물러가오.”
흥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길게 탄식하며 대궐문을 나섰다. 흥수가 물러가자 간신배들은 또 왕을 들쑤시기 시작하였다.
“저런 것들이 말공부 때문에 나라가 소란스럽고 인심이 흉흉하니 멀리 쫓아버리는 것이 좋을 줄 아오.”
“흥수와 성충은 일두쌍신(一斗雙身)이나 다름없으니 속히 쫓아버리는 것이 옳을 줄 아오.”
어리석은 의자왕은 마침내 간신들의 말대로 흥수를 멀리 고마미지(古馬彌知)라는 곳으로 귀양보냈다.
흥수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한 몸이 고생하거나 죽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라 일을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구나!”
정배길에 오른 흥수는 한숨을 지으며 다시 한 번 돌아서서 멀리 도읍지를 바라다보았다. 한편 옥에 갇혀 밥 한술 물 한 모금 구경도 못하고 뼈만 남은 성충은 자리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고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 때까지도 일신의 죽음이라는 공포감보다는 나라의 운명이라는 사명감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옥문 앞까지 기어갔다.
“이봐라, 어서 필묵을 들여보내라. 대왕께 드릴 말씀이 있다.”
평소에 성충을 존경해오던 옥졸들은 그의 요구대로 필묵을 들여보냈다. 성충은 땅바닥에 쓰러진 채 간신히 속적삼을 벗어 쫙 찢더니 흰 헝겊 위에 무엇인가 한자 한자를 정갈하게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이윽고 그는 흰 헝겊을 돌돌 말아 내보냈다.
“이것을 급히 대왕께 전해라!”
말을 마치자 성충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이 그 글을 보나보니 대략 이러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신은 이제 한마디만 남기고 죽으려 합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