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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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4.0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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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와 <증언들>(2019)을 꽤 인상 깊게 읽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여자>(1969)를 읽을 때도 내심 기대했다.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이 먼저지만 출간 순으로 보면 <먹을 수 있는 여자>가 훨씬 앞선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여주인공 메리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친구 클래라에 따르면 그녀는 “거의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정상”적이다. 겉보기에 그녀는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안정적인 직장과 재미있는 친구들과 잘생기고 장래가 촉망되는 약혼자 피터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음식에 대해 거부 반응을 갖기 시작하고 그녀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점점 늘어간다. 그녀의 거식 증상은 피터의 프러포즈를 수락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전까지 그녀는 전통적인 여성의 성 역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러포즈의 수락 이후 그녀에게 요구되는 성 역할에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된 역할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그녀에게 거식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거식 증상과 함께 불안감이 메리언을 엄습한다. 그녀는 방문 설문조사 업무를 하다 알게 된 덩컨을 빨래방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많은 하객을 초대한 약혼 축하파티를 거의 의도적으로 망친다. 그녀는 약혼자 피터를 남겨둔 채 덩컨을 만나기 위해 파티장을 떠난다. 하지만 도피처라고 여겼던 덩컨과 함께 보낸 하룻밤도 그녀의 불안을 치유하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빈집에 홀로 돌아와 사람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모든 사람이 떠난 뒤 그녀는 ‘먹을 수 있는’ 여자로 돌아왔다.

<먹을 수 있는 여자>가 다루는 주제는 남자, 사회, 음식, 먹는 행위와 여성의 관계 등 다양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음식과 먹는 행위를 통해 남성 위주의 현대사회를 향한 젊은 여성의 반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지만 메리언은 사회에서 부여하는 성 역할과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자아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녀의 갈등과 반항의 상징이 바로 ‘음식’이다. 그녀가 잘 보여주듯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역할에서 벗어나고 불공정한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강인하고 독립적인 자아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그녀는 음식과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독립적인 자아를 구축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즉 그녀는 여자 형상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거짓되고 공허한 정체성에서 탈출하고 자신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먹을 수 있는 여자>의 배경은 1960년대 초반의 캐나다의 어느 도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지금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풍경과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남녀평등이 이루어져 페미니즘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된 페미니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페미니즘은 현재 진행형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톺아보면 두 번의 중요한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 변곡점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으로, 이때 페미니즘은 주로 여성 참정권을 비롯해 제도적인 성평등에 집중했다. 두 번째 변곡점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전반이다. 미국에서 시작돼 서구 전반으로 번진 이때 페미니즘은 담론의 범위를 섹슈얼리티, 가족과 직장 내에서의 실질적인 불평등, 법적인 불평등, 재상산권 등으로 넓혔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 중반에 쓰인 <먹을 수 있는 여자>는 저자의 말처럼 페미니즘 문학이 아니라 “프로토페미니즘 문학”에 가깝다. 즉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정수’나 ‘핵심’이 아니라 ‘원형’이자 ‘출발점이다.’

사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과 견해가 존재한다. 일례로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4)에서 페미니즘을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상”으로 규정했다. 정의로 본다면 누구도 대놓고 부정하지 못할 만큼 당연해 보이는 이 사상이 혁명성을 띤 것은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2021)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은 주로 법과 제도의 개선에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페미니즘 운동은 법과 제도의 개선뿐만 아니라 관습, 문화, 언어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초기 페미니즘 운동과 대별된다. 특히 메갈리아와 워마드에서 시작된 여성혐오를 남성혐오로 바꿔 되돌려주는 ‘미러링’은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러링은 제도 개선 요구를 넘어 남성 중심의 관습과 언어습관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만큼 강력한 ‘백래시’를 불렀다.

솔닛의 주장을 조금 바꿔 말하며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인 만큼 남성 또한 여성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존엄하다. 성별뿐만 아니라 재산, 종교, 성적 취향,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당연히 ‘존엄’에 있다. 제대로 된 페미니즘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의 페미니즘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혐오와 폭력으로 무장한 미러링과 백래시를 보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애트우드의 <먹을 수 있는 여자>는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예거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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