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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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 김주호 <광천제일장학회 이사장>
  • 승인 2021.06.0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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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때 함경도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정문부(1565-1624) 장군은 1588년(선조21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관직으로 출발해 1591년 6품직 북병영(함경북도 병마절도영-현 사단규모 육군부대) 평사(評事-육군소령)로 부임했는데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에 투항하자 의병장이 되어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으로 진격해 임해군과 순화군(선조의 왕자)을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과 정말수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했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해 혈전을 벌였으며 왜군 600 여명의 목을 베고 많은 군장물을 획득했다.

이를 ‘길주 장덕산(長德山)대첩’이라 하는바 이때 의병군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해온 왜군(대장 가또오 기요마사) 2만 여명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쳐 큰 성과를 거뒀고 왜군은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정장군은 이때의 무공으로 점차 승진해 예조판서(지금의 외교부, 교육부장관)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퇴관했다가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그 후 숙종 때 신원돼 좌찬성에 증직되었는데 당시 북병영 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정문부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길주에 건립했는데 이 비석이 바로 사연 많은 ‘북관대첩비’이다 

1905년 노일전쟁때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사단장 이케다(池田) 소장이 이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반출,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말이 보관이지 한쪽 구석에 처박아 뒀음)한 것을 1978년 재일 조선인 학자 최서면 박사(국제한국학연구원장)가 우연히 발견하고 정문부 장군 후손들과 함께 꾸준히 노력해 30년이 다된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돼 대통령 참관 하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다가 다음해 복제비를 만들어 경복궁에 보관하고 원비는 북한으로 보냈다. 

호국유물이 북으로 간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회담하면서 NLL(서해북방한계선) 이 위로 올라가면 어떻고 내려오면 어떠냐는 망언을 했는데 그런 식이라면 휴전선도 올라가면 어떻고 내려와도 좋다는 의미 아닌가! 이러다가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북관대첩비처럼 몽땅 북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호국보훈의 달(6월)을 맞아 현충원을 참배하고 100번을 조아린들 몸 따로 마음 따로 이니 호국영령(護國英靈)들께서 혀를 차고 계실 것이다.

언필칭 개혁군주 정조 대왕을 닮았다고 참칭했는데, 그 정신을 온전히 계승했다는 지금 대통령은 한 술 더 떠서 사법부(司法府)는 사법부(詐法府)로, 법무부(法務部)는 법무부(法無部)로, 국방부(國防部)는 국방부(國放部)로 개명하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을 국해의원(國害議員)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아니라 폐주(廢主)연산군에 다름 아니다. 도처에 문비어천가 울려 퍼지고 내로남불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 강산(江山)을 어이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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