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家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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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家系圖)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10.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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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고리는 대를 이어 연결돼 한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 다음 세대에서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같은 문제가 여러 세대에 걸쳐 변형되기도 하고, 원형 그대로이기도 한 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는 20대 직장인이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와 잦은 갈등으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머니게임을 유튜브로 시청하거나 액사(EXA)게임을 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든다. 눈과 어깨, 허리가 아프지만 성인 콘텐츠를 몇 편 시청해야 잠을 청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온라인게임 리니지를 하면서 1000만 원이 넘는 현질을 했다. 1년 연봉의 1/3을 한 달 만에 써버린 셈이다. 이러한 일상이 지속되던 중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심각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삶이 지속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암울함과 불안감이 솟구쳐 본인 스스로 간절한 마음으로 상담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H는 조용한 아이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PC방에서 게임을 즐기는 보통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H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섯 살 위인 누나가 혈액암 진단을 받고, H가 중학교 1학년 때 가족의 품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누나였고, 어디서나 명랑하고 활달해서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H는 엄마보다 누나에게 더 많이 의지했고, 누나의 도움으로 공부와 숙제를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누나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 부모님은 누나의 치료를 위해 서울을 오가시느라 H의 일상생활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맹장염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좋아하지 않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이겨내야 했고, 학교의 준비물도 알아서 챙겨야 했다. 그때마다 누나가 얄밉기도 했지만 막상 누나와 생이별을 하자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가득했고, 침통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아이로 행동하게 됐다. 

가계도(家系圖)는 1980년대 초 머레이 보웬(Murray Bowen), 잭 프롬(Jack Froom), 잭 매달리(Jack Medalie)와 같은 가족치료와 가정 의학 분야의 인물들로 구성된 가계도작성위원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가계도는 3대에 걸친 가족원과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복잡한 가족 패턴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가족 정보를 도식화해 보여준다. 특히 가족에 관한 구조적, 관계적, 기능적 정보를 수평적 가족 맥락과 가족의 세대간 전수되는 수직적 과정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현재와 과거를 검토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증상이 어떻게 발달됐는지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도록 풍부한 자원을 제공해준다.

H는 상담 중 가계도를 작성하면서 어머니와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유복자(遺腹子)로 막내딸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술을 좋아했고, 간질환으로 돌아가셨다. 홀로 2남 2녀를 양육하신 외조모는 어머니를 항상 안쓰러워했고, 몇 년 전 뇌경색으로 돌아가시면서도 이모에게 어머니를 잘 챙겨달라는 유언을 하실 정도였다. 외조모의 극진한 돌봄을 받은 어머니의 이복 형제, 첫째 외삼촌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둘째 외삼촌의 술로 인한 별거 등은 어머니의 정서와 사고,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이해가 됐다. 

H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애기했던 어머니의 말이 자신의 결혼관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도 알았다. 그리고 누나의 죽음은 자신에게 병에 대한 두려움과 신체에 대한 건강염려증을 갖게 했으며, 누나를 대신해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직업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도 이해하게 됐다. 더 나아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수된 병력과 사건, 관계, 정서 등이 자신의 성격과 선택에 영향력을 미치는 조정자가 됐으며, 게임과 유튜브 등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대리만족을 가졌던 행동도 이해하게 됐다. 

가계도를 통해 자신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H는 퇴근하면 저녁을 먹은 후 헬스장으로 향한다. 1~2시간 정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도 하고, 여자 친구와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 등을 솔직하게 나눔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됐다. 그리고 직장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해졌으며, 일과 게임사용에 대한 균형을 갖게 됐다. 교육사상가인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94)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혼자일지라도 어디를 가든지 혼자일 수 없으며, 마치 씨줄과 날줄로 뒤얽혀 짜인 역사와 문화라는 옷감의 일부가 돼 있다고 했다. 곧 개인은 가족이 가장 근본이 되는 체계이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최명옥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 박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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