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새 아침, 정동진에서
상태바
임인년 새 아침, 정동진에서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1.06 08: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으며 지난해와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어제 뜨는 해와 오늘 뜨는 해가 다르지 않지만, 오늘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빈다. 홍성과 가까운 서해안 마량포구에서 가끔 새해를 맞이하곤 했지만, 올해는 동해안 정동진으로 발길을 옮겨 봤다. 언덕위에 얹혀 있는 여객선 앞머리에 붉은 해가 솟구쳐 오르며 태양의 아우라(aura)가 아침의 냉기를 녹여냈다. 목 좋은 곳에 카메라를 일찍 설치한 사람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있는 법인가보다. 사람들은 찬란한 태양을 향해 금빛 희망을 쏟아내며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 기대될 때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희망은 내일로부터 무이자로 빌려오는 거래다. 희망이 있을 때 개인과 사회는 온기가 돈다. 희망이 없는 삶은 포기와 비난과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두려움은 그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울 거라는 가능성이 열려있을 때 엄습한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 겪어보지 않은 내일에 두려움을 갖는다. 낮선 곳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낼 때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성경(Bible)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을 반복해 들려주는지 모른다. 그 말은 인간이 원초적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도 ‘두려움은 이미 두려운 무언가가 다가올 수 있도록 세계를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바이러스 팬데믹(유행)으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야 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혹시 저 사람이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2년 동안 국가가 하라는 대로 백신도 맞고, 여럿이 모이지도 않았지만 바이러스의 변이종이 잇달아 나오고 감염 확진자를 쏟아냈다. 언제 바이러스 팬데믹이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중국은 시안에 봉쇄령을 내려 사람들이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도 오미크론으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 팬데믹 사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이 걷히면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수 있다. 유럽에서도 페스트가 물러가자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지금 차분히 준비할 시간이기도 하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계속되는 가운데, 올해 대통령선거와 지자체장 선거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선거는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도 한다. 정치가 삶의 양태를 결정짓는 큰 테두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온갖 보도 매체마다 선거 이야기로 날을 지새운다. 그러다보니 비생산적이고 지루한 정쟁은 때로 정치에 대한 환멸을 가져오기도 한다. 정당들은 표를 얻기 위해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정책보다는 상대방의 과거를 들춰 비난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매달리기도 한다. 눈만 뜨면 듣게 되는 상대방 후보와 가족들의 부정적 과거사들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지도자감이 될 수 있는지 강한 의구심마저 든다.

정쟁만 일삼는 말싸움에 정치 무용론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기본적으로 말을 바탕으로 한다. 말은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고 그 기반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지만, 말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꾸고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의 진정성은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그 답은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행적에 있다. 지나온 삶의 모습이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은 또 거짓말로 주변을 속이게 마련이다. 후보자의 화려한 언어 수사(修辭)에 속지 않는 방법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보고 투표하는 것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법을 본적이 없다. 정치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장밋빛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정치에 대해 인상적인 통찰을 보여준 자크 랑시에르가 ‘노동, 교환, 향락의 세속화된 활동들’을 배열하는 기술이라고 말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정치는 말로 하는 기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도 있지만, 잘못됐을 때는 파멸을 낳을 수 있다. 정치가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파국이 아닌 희망이 되길 기원한다.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서 2년의 통제된 삶은 현재뿐아니라 미래마저도 피폐하게 만든다. 현재의 상황이 끝난다하더라도 바로 옛 모습으로 사회가 돌아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와중에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은 희망의 끈마저 놓게 만든다. 잘 살게 해주겠다던 정치가들의 공약(公約)은 휘발돼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희망은 늘 남아 있는 법, 판도라의 상자 속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것이 희망이었던 것처럼. 새해 정동진에 솟아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좋은 날들이 도래하길 기원해 본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칼럼·독자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