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과 끝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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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과 끝인상
  • 최윤종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8.25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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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옆 동네 예산은 사과 향이 가득하다. 고교 시절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예산으로 가서 미팅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예산을 지날 때면 그 때의 아련한 추억에 미소 짓곤 한다. 과수원길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가서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허름한 제과점에 들어가 예산여고 학생들과 테이블 위에 소지품을 꺼내놓고는 긴장 속에서 짝꿍을 찾았다. 생각해 보면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 때 내 짝이었던 소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 성인이 됐을까? 미팅을 하루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 여드름을 터뜨려 피를 짜내며 얼마나 준비했는지 모른다. 첫인상을 좋게 심어 주려는 쉽지 않은 몸부림을 그 때 이미 했다고나 할까?     

‘첫인상’이라함은 말 그대로 누군가를 처음 보았을 때 기억되는 이미지 혹은 느낌이다. 많은 경우 누군가에게서 이 첫인상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고집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첫인상에 많은 것을 투자하는 것 같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각적 효과 혹은 청각적 효과 등을 기대하면서 실로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것을 본다. 때로 나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인정해 줄 수도 있다지만 한편으로는 너털웃음과 함께 그러한 내 자신을 보면서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적지 않다. 

철없던 어릴 적부터 불혹(不惑)의 때를 거쳐 이제는 나도 지천명(知天命)의 때를 넘어 섰다. 돌아보니 적지 않은 만남이 있었음을 회상하게 된다. 그런데 머릿속을 스치는 그들에게 있어서 첫인상으로 각인돼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히려 ‘끝인상’이 남아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첫인상은 오히려 끝인상에 퐁당 담겨지는 것이고 정말 남는 것은 끝인상이다. 첫인상이란 말은 필자가 군대 시절 가요톱텐 연속 5주 1위로 골든컵을 수상했던 노래 제목이기도 한데 이는 얽히고 섥혀 사는 인간사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 포인트임을 말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에 끝인상이란 말은 사전에조차 나오지도 않는 말이다. 

하지만 끝인상은 얼마나 중요한가! 만사가 그렇듯 끝에는 모든 것이 함축돼 스며있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시작보다도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그 사람의 평가 요소가 되는 것이다. 첫인상은 사람의 외면에 무게감을 두는 것이지만 끝인상은 사람의 내면에 무게감을 두는 것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끝을 보면 그의 외면보다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성경말씀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끝인상을 위한 마음의 단도리를 해보면 어떨까? 먼저는 ‘첫인상’에 관심을 덜 가지자.

첫인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 첫인상에 묶이지 말자는 것이다. 자신이 세워둔 기준에 사람을 판단하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들리는 것은 들리는 대로 그저 인정해 주면 그 뿐이다. 여기에 나의 판단은 충청도인답게 늦추는 것이다.

둘째는 ‘과정’에 관심을 더 가지자. 중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관계에 있어서 아부와 충성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가장 크게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라는 대상의 차이겠지만 결국 진정한 충성은 지속력이 있기 마련이다. ‘드러냄’보다는 ‘드러남’을 기대하며 일관된 삶의 태도가 필요한 때이다. 

셋째는 ‘일과 사건’에 관심을 덜 가지자. 일의 성사와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사람을 향한 소홀함이 자칫 있을 수 있다. 사람을 향한 관심이 결코 일과 사건의 성과상승에도 상반되지 않는다. 오히려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앞서면서 이를 간과 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특히 민주사회에서 다수결에 의한 대중에 파묻힐 수 있는 소수의 존중까지도 생각하면서 사람을 향한 관심이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 

넷째는 ‘지금’에 관심을 더 가지자.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다. 사물도, 사람도, 사건도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잊고 사는 영역이다. 이를 항상 상기하면서 지금을 살아낼 수 있다면 그 시간의 축적은 고스란히 마지막으로 담아지게 될 것이다. 노을빛이 실로 아름다운 것처럼 마지막의 드러남이 더 멋지길 기대한다면 지금을 더더욱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기보다 날마다 웃는 자가 되는 것은 어떨까?

손에 쥐어든 볼펜이 땀에 미끈거리면서도 제 몸의 잉크를 소진시켜 가면서 내가 원하는 글을 비로소 써 내리고 있다.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누군가의 말처럼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 원한다”는 말의 실행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끝인상이다. 누군가에게 끝인상을 안겨주게 될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더욱 신실하게 마음을 지키며 사는 세상살이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최윤종 <홍성침례교회 담임목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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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2023-09-30 15:02:26
고향소식에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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