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몸, 새로이 빛나는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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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몸, 새로이 빛나는 예술혼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0.12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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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유럽전역에 자유의 물결이 들불처럼 번져 나아갈 때, 유럽발 민주화 열풍은 가까운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고, 국내의 많은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열망하며 반군사정권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1967년 대통령 재선에는 성공했으나, 장기집권을 위해선 국회의원 선거(1967년 6월 8일)에서 개헌이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됐다. 이와 관련 1967년 6월 8일 선거에서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6·8 부정선거에 대해 대규모 규탄시위를 전개하자, 정부는 6월 16일 기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국내 정치상황은 대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이주하거나 유학을 떠난 많은 한국인 중에는 한국 정부의 부정부패와 정쟁(政爭)에 비판적 시각을 갖은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동서베를린은 상당 수준 자유왕래가 가능했고, 서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동베를린으로 식료품이나 서적 구입 등 이유로 출입했다. 당시 북한은 동베를린에 대사관을 뒀고 여러 경로를 통해 소수의 한국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북한공작원들과 접촉하는 일들이 발생했는데, 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유학생들에게 한국음식 제공이나, 북에 있는 가족 탐문 등이 접촉의 이유였고, 극소수가 방북이나 노동당 입당하는 일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한국 정부에도 빠르게 전달됐다.

이러한 국내외 정치적 상황이 맞물리는 상황에서 1967년 7월 중앙정보부는 ‘동백림(東伯林,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 사건’을 발표하며 독일과 프랑스로 이주한 교민과 유학생 등 194명의 지식인을 대거 간첩혐의에 연루시켰고, 그중 주동자급 인사 30여 명을 지목했는데, 화가 이응노(무기징역, 당시 63세)와 작곡가 윤이상(무기징역, 당시 50세)이 포함됐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주모자로 지목된 교포와 유학생들을 서독에서 납치해 한국으로 송환하는 일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서독 정부와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응노는 ‘해외 국위 선양 예술인 초청 전시’라는 명분에 속아서 귀국을 종용당한 후 어떠한 법률적 변호도 받지 못한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아들 이문세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 이유이었다. 예술가로서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기막힐 일인데 게다가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는 암울한 수감생활은 이응노를 극단적 상황까지 내몰았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면서 이응노가 유명한 화가임이 알려졌고 다행히 그림만은 그릴 수 있도록 간단한 그림도구가 제공될 수 있었다.

참담한 옥중에서도 그의 예술 열정과 창의력은 식을 줄 몰랐고 다시금 빛을 발하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낡아빠진 부채에 달걀껍질을 쪼개 붙인 작품 <황금부채>, 쇠못으로 양은그릇을 뚫으며 응어리진 한을 풀어낸 작품, 밥과 휴지를 섞은 종이죽으로 사람 형상을 빚은 작품 <군상>, 간장과 김칫국물을 손가락과 젓가락으로 찍어 그린 풍경화, 신문지 위에 문자추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새겨 넣으며 자신의 새로운 화풍을 열기 위한 씨앗들을 만들어냈다. 아울러 이응노가 회고하였듯,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그 시기에, 그는 “교도소 안에서 수다한 굴곡진 삶을 겪어낸 민초들의 가슴시린 이야기를 들었고, 민중의 가난한 마음과 애달픈 삶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됐으며, 민족과 공동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자신의 작품에 담고자 했다”고 술회했다. 훗날 이응노가 <문자추상>과 <군상> 시리즈 등을 통해 민족통일, 평화, 인류애 등을 담았던 점도 옥중시기의 깨달음이 얼마만큼 그의 화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와 서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자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형집행정지가 내려졌고, 이응노는 1969년 3월 형집행정지 처분에 따라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했으며, 그해 5월 하순경에 프랑스로 떠나기 전 옥중에서 제작한 수많은 습작과 완성된 작품 중 세심하게 골라 <옥중작품>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응노의 회고에 따르면 옥중에서 완성된 작품이 약 300여 점 정도 됐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 너럭바위에 새겨진 <문자추상> 암각화와 깨진 구들장에 새긴 작품을 남겼는데, 출소 후 2개월간(1969년 4~5월) 요양을 위해 잠시 여관에 머물면서 제작한 작품이다. 

황찬연 <천안시립미술관 시각예술팀장,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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