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는 세계 평화를, 마음에는 하나 되는 조국 통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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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는 세계 평화를, 마음에는 하나 되는 조국 통일을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1.09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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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응노의 삶과 예술여정에서 청천벽력 같았던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인해 억울한 수감 생활을 하며 그의 화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응노의 회고에 따르면 “2년여의 옥중생활 시기는 자신의 화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며, 마치 30여 년을 갇혀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옥중생활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인류애, 평화, 사랑, 조국 통일에의 염원이 더욱 강해졌다고 술회했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후 1970년대부터는 동양의 한자와 세계 문명의 문자 시원을 연구했고, 동양의 상형문자와 금석문, 수메르어, 고대 페르시아어 등 페르시아 문명의 쐐기문자, 아랍문자, 유럽 전통의 캘리그라피 등을 자유자재하게 구성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추상형식을 실험한다. 나무, 바위, 구름, 새, 곤충, 말, 사슴, 거북이 등 자연사물과 동식물의 형상, 사람 형상, 각종 문자를 결합해 마침내 문자추상(Composion,구성)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이후 태피스트리(직물), 헌 목재, 나무가구, 양털, 솜, 한지, 도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독특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문자추상 작품으로 확장시켰다. 복잡한 구조의 문자와 동식물의 형상이 결합하면서도 간결한 짜임새와 3차원적 깊은 공간감은 유럽 예술인들에게 높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응노가 주창했던 “동양미학을 근간으로 한 서양미학과의 결합”, 그리고 “동양과 서양미술의 구분을 넘어서는 동시대적 현대미술 추구”의 결실이 “문자추상”이라는 현대적 양식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인생노정에 한번 있기도 어려운 일이 이응노에게 또 일어났다. 1976년 ‘백건우·윤정희 납치미수사건’이다. 사실규명이나 어떠한 항변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로 ‘한국 입국금지 및 한국 활동 금지조치’를 당해야 했다. 간첩누명도 모자라 이제는 그리운 고향, 조국의 흙조차 만져보지 못하는, 조국을 잃어버린, 아니 조국에서 버림받은 예술가가 돼버렸다. 이러한 연유로 1983년에 이응노는 지난 20여 년간 거부해왔던 프랑스 귀화(Naturalization)를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하게 됐다. 한국의 정치가, 이념의 대립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예술가를 프랑스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이응노는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저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통일돼야 살길이 있으며, 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발 벗고 나설 용의가 있습니다. 예술이란 뿌리 찾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응노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지식인, 국민이 주창했던 ‘민족주의’는 모든 사람의 신념이었고, 남북통일이야말로 반듯이 이뤄져야 하는 국가적·국민적 염원이었다. 이응노는 그 수많은 사람 중 그림 그리는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응노는 ‘군상’의 초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 ‘인간’을 핵심 주제로 한 완성된 ‘군상’ 연작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80년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먼 타국에서 접한 이응노는 붓을 들어 민중들의 함성을 그림에 새겼고, 민중들과 함께 평화와 자유를 염원했다. 1988년 10월, 국내의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군상’ 연작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그림은 모두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저 봐요.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존공생을 말하는 민중그림 아닙니까? 그런 민중의 삶이 곧 평화지 뭐. 이 사람들이 바로 민중의 소리이고 마음이야.”

황찬연<천안시립미술관 시각예술팀장,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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