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詩]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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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詩] 틈
  • 서현진 <시인>
  • 승인 2023.11.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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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
수백 번 왔던 길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빙빙 돌다가 겨우 눈에 익은 건물 
실마리를 찾아 집에 돌아온다거나

아침에 당근을 썰다가 
갑자기 어긋나버린 칼날이
새끼손가락을 공격할 때

얌전히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숟가락이
바람 한 점 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열려 있던 화장실 문이 하얀 햇빛에 질려
스르륵 닫힐 때

길을 걷다가 
술 취한 사람이 던진 소주병이
간발의 차로 내 옆을 스칠 때

전날 무심한 듯 인사하고 헤어진 친구가
다음 날 아침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부고를 접할 때

완벽해 보이는 풍경 속에
어쩌면 가깝고 친숙한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낯선 틈 같은 것이
아가리를 벌렸다 닫혔다 하고 있어서
흔히 우연한 사고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고
한번 빠지면 돌아올 수 없는 
우리의 한쪽 발을 그림자처럼 노리고 있는
양털 구름 뭉텅뭉텅 그려져 있는 푸른 하늘을 
세로로 쭉 찢으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데

깨금발 모둠발로도 피할 수 없는 법
그러므로
눈 질근 감고
오늘도 무사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잠옷 입은 소녀를 
오래도록 볼모로 삼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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