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서 겨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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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서 겨울 사이
  • 최복내 홍성그린리더 회장
  • 승인 2012.11.3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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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내 홍성그린리더 회장
읍내의 한적한 아파트 앞, 깊어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담장 옆에 높은 감나무가 늘어서서 백월산 봉우리들과 높이를 겨루고 있다. 마당은 텅 비어 바다 밑 같이 고요한데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만 전등 빛같이 빨갛다. 나는 감나무의 굵은 밑동에서부터 가지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 높은 끝에 이른다. 가지가 끝나는 곳에서 무한의 공간이 시작된다. 가는 가지와 희끄무레한 겨울하늘 사이에 아련히 기쁨이 솟는다. 본다는 것은 눈을 움직인다는 것이랄까. 그렇게 가지를 오르내리다보니 나무 전체의 모습이 환하게 다가든다. 그러다가 천정을 보고 뒤로 누우면 가까운 나뭇가지들이 그물처럼 얽히며 창틀을 덮어 버린다.

이름 모를 새가 두 마리 날아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지 끝에서 빨간 감을 쪼아 먹는다. 그러다 두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니 조용하기만 한 가지들이 금방 생기를 띠고 살아나 커다랗게 팔을 내젓는다. 잎이 떨어지면 나무는 모습의 특색이 더 드러난다. 여름에 사뭇 명랑하던 포플러는 가을에도 가지들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시원하다. 팔랑거리던 잎은 없지만 뻗어난 가지들이 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산뜻한 느낌을 띄운다. 아카시아의 가지는 또 가시들이 다닥다닥 돋아나 공간을 찔러댄다.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아픔이 몸에 와서 느껴질 정도다. 겨울의 나뭇가지는 자기의 성질을 공간에 물결처럼, 음악처럼 번지게 한다고 할까. 대추나무의 야무진 가지는 불룩한 마디에서 한 번씩 뚝 꺾어질 때마다 하늘을 이리한번 꽉 쥐어박고 저리한번 박는 것 같은데, 그 충격이 그 근처 공간에 자꾸 반복되고 가득 들어차 몸에까지 와 닿는다. 말하자면 공간이라는 화폭은 거기에 그어지는 몇 줄기 나뭇가지로 질이 정해진다고나 하겠다.

오동나무의 몇 개 안되는 굵은 가지는 공기를 덩어리지게 하고, 잔가지가 가지런히 서 있는 배나무 위에는 잔잔한 물결이 인다. 높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밑을 지난다. 우러러보니 거기에 그어진 수많은 선으로 하늘을 여름과 딴판의 새로운 모습을 띤다. 그늘이 없고 막히는 데가 없이 투명하고 율동적이고 화사하다. 추위는 사람의 몸을 웅크리게 한다. 처음 추위가 습격하는 날 길 가는 사람들을 보면 주먹이라도 한 대씩 얻어맞은 것 마냥 눈이 쾡 하니 놀란 얼굴들을 하고서 방어하듯 웅크리며 달아나기에 바쁘다. 거리는 공포분위기라도 감돈 듯이 텅 비어 삶의 그림자가 드물다. 그러나 나뭇가지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유 있게 팔을 벌리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도리어 그것을 회초리로 아프게 갈겨준다. 여름에 빛을 받고 공기를 마실 때는 나무도 양털같이 부드러운 잎으로 공간을 포옹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몸을 뒤치며 수런거렸다. 그러나 바깥과의 교섭을 끊어버린, 이제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뜻이 다른 새로운 자유를 즐기고 있다.

겨울은 사람을 좁은 공간 속에 몰아 붙여 가두어 놓으려 든다. 그러나 겨울이라고 다 겨울은 아니다. 겨울 속에는 겨울보다 훨씬 많은 봄이 사이사이 끼어 있다. 추위가 맹위를 떨다가도 잠깐 풀리는 날 양지바른 산비탈이나 냇가 둑길을 걸어보라. 때는 삼동이라는데 밝은 햇살 끝에 군데군데 파란 풀들이 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떠들다가 뛰어가고 나면 쫄랑거리는 물 위에 햇살이 반짝인다. 또 찬바람이 몰려오겠지만 지금 이것이 가을이지 겨울인가. 길을 걸어본다. 나무마다 잔가지들이 연기같이 뿌옇게 흐려져 있어 거기서 피어나는 겨울날의 옅은 안개가 마치 봄 안개 같은 착각을 일게 한다. 가다가 멈춰 서서 길가 나무를 들여다보면 잔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눈들이 금방이라도 싹이 틀 것만 같다. 겨울의 한가운데 인데 바람 속에서 봄의 향기를 맡는다. 지난 늦가을에 언덕 위 나무들이 가랑잎을 날리는 것을 보고 슬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겨울나무가 추워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언덕진 과수원 옆을 지나다가 잔가지가 펼쳐진 발처럼 가득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후련하다. 그 사이로 비춰 보이는 산줄기의 옆으로 달리는 가까운 선과 먼 선의 물결, 밤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는 후미진 곳에 고요하고 썰렁한 검은 그늘이 들어섰고 그 위에 기운 햇살이 아롱진다. 그 빗줄이 나뭇가지에 얽혀 화사하다.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드니 멧새들이, 갑자기 나타난 선생님을 본 동네 아이들 마냥 푸드덕 날아서는 킥킥거리고 떠들며 앞을 다투어 달아난다. 그쪽 뽕나무밭 수없는 가지들이 내가 옆을 지남에 따라 서로 스치면서 무수히 반짝거리는데 지저귀는 새소리 같은 반짝임이 넓은 밭 위에 가득 찬다. 이제 추위를 존경해 줄 것도 없지만 그가 위엄을 부리더라도 그 아픔을 꾹 참아보라.

그러면 몸속에 베어든 추위가 이상하게도 새로운 힘이 되어 흐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다. 나무들은 제각기 참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의 자세를 하고 있지 않는가. 손가락을 뻗어 거침없이 선을 그으며 공간을 움켜쥔다. 그러면 거기에 그가 파악한대로의 세계가 아름답게 펼쳐 나간다. 서둘지 않은 그 유연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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