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황정민이 주연을 맡았던 연극 <맥베스>가 전 좌석 매진, 추가 공연 등을 거치며 8월 18일 막을 내렸다.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황정민, 송일국이라는 연극배우, 무대장치 등이 함께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냈을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맥베스>는 공연해 성공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 연극들은 셰익스피어 당시, 조명이 없었던 무대에서 오후 2시 정도에 시작됐고, 피비린내 나는 음울한 복수 분위기를 연출하기가 쉽지 않아 관객의 몰입을 끌어내기 어려웠다. 공연장은 비행(卑行)의 장소가 되기도 해 잠시 문을 닫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엘리엇(T.S. Eliot)은 <맥베스>는 운문(韻文)으로 씌어 졌기 때문에 공연보다는 소리 내어 읽는 편이 오히려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독백을 운율에 맞춰 읽어보면 그의 견해가 틀리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가끔은 사석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의 독백 부분을 멋지게 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인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서도 공연해 성공을 거두기 쉽지 않은 작품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성황리에 마치게 된 이유가 극장시설의 훌륭함, 배우, 무대장치나 미술 등으로만 돌리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아마도 <맥베스>라는 작품이 이 시대의 한국적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추가하고 싶다.
<맥베스>의 맥베스는 왕을 죽이고 내가 왕이 되어 멋진 세상을 펼쳐 보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왕을 죽인 죄책감으로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허둥대다 정치적 위협이 될만한 주변 인물들을 사정없이 처단하는 악당이다. 폭정을 하면 할수록 불안해지고, 그의 정적들은 연합해 전선을 넓게 펼친다. 대결에서 그는 결국 패배하고 머리통은 비참하게 땅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이런 악당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건 악행을 하면서도 그의 내면에서는 인간적 갈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용감무쌍한 장군이었던 맥베스가 왜 갑자기 선하고 덕이 많은 던컨 왕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을까? 맥베스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을 부추겨 그의 욕망을 자극했노라고 독자나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목표를 향한 레이디 맥베스의 캐릭터는 강렬하기 이를 데 없다. 맥베스가 던컨 왕을 죽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당신도 남자냐?’라고 남편의 자존심을 긁는다. 사내가 맹세를 했다면 “어린 것이 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방실방실 웃고 있다고 해도, 이빨도 나지 않은 그 말랑말랑한 잇몸에서 내 젖꼭지를 빼내고, 메어쳐서 그 머리를 부수어 버렸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비해서 맥베스는 용맹무쌍한 장군이었지만 자신의 손에 묻은 피는 “위대한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의 온 바닷물인들 이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낼 수 있을까?”, “아라비아의 온 향수를 다 바른다 해도 이 작은 손에서 향기가 나게 하지는 못할 거야”라고 읊조리는 나약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편을 왕으로 만들려는 강렬한 레이디 맥베스라는 칩이 맥베스의 머릿속에 삽입된 듯 맥베스는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된다.
맥베스의 욕망을 부추긴 것은 맥베스 부인뿐이었을까?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튼(Terry Eagleton)은 맥베스 부인이 아니라 마녀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과 같다고 말한다. 마녀들이 맥베스의 욕망을 자극했다는 의미다. 맥베스가 외적을 물리치고 보무(步武)당당하게 개선(凱旋)하는 곳에 마녀들이 나타나서 당신은 코더의 영주가 될 것이고, 다음에는 더 큰 영지의 영주가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이 말에 맥베스는 심리적으로 흔들린다. 아니 그의 무의식 속에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녀들이 이것을 부추긴 것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他者)의 욕망”이라고 했던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ques Lacan)의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이다.
마녀들은 또다시 등장해 여성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자에게 맥베스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라 예언했지만 요즘의 무당 같은 마녀들의 말이 항상 맞을 리가 있겠는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 왕(王)자를 손에 쓰고 다녔던 사람의 모습,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부인은 명품 백을 받아서 고역을 치르고 있는 정황도 겹쳐진다. 잘 해보자는 취지였겠지만 선거 전에 여론만 믿고 황급히 발표한 섣부른 의료정책은 의료대란으로 연결돼 전공의들과 지방대학 의대 교수들은 병원과 대학을 떠나고 응급실은 대혼란을 겪고 있다. 어느 유명인사는 넘어져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간신히 이마를 꿰매고 돌아와 대통령이 “자기가 모르는 걸 확신을 갖고 밀어붙이려고 하니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급한 마음에 너무 크게 휘두른 칼이 남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향할 수 있음을 맥베스는 보여준다. 준비 안 된 자의 모습이다.
맥베스의 야망을 부추겼던 레이디 맥베스가 죽자 맥베스는 “인생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는 연극배우, 연극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들리지 않네, 인생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라고 읊조린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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