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의 소통이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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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의 소통이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11.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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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어떤 사건이나 경험이 개인의 심리에 크게 영향을 미쳐 그 사람의 심리적 안정을 파괴할 수 있다.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 가족이나 이웃이 죽어가는 모습을 봤다면 그 사람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어린 시절, 강압적인 환경에 살거나 배고프거나 불안정한 생활에 노출된다면 성장한 후에도 그 영향의 자장에 놓이기 쉽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그러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추적한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불쾌한 사건들이 의미 있게 추후에 재구성되거나, 폭력과 추행과 같은 사건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트라우마는 그리스어로 상처를 의미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현실이 무너질듯한 고통으로 작동된다. 가슴 깊이 묻어둔 이야기이기에 이곳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음을 작가들은 감지한다. 작가는 이러한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꺼내 타인의 공감을 얻어내고 그것과 맞서 이겨내려 한다. 그것이 사회와 공명할 때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벨상 위원회는 한강 작가에게 이러한 이유로 노벨상을 줬다. 과거의 사건을 내 개인적 내면세계에 끌어들여, 나는 이렇게 힘들고 아팠는데 당신은 어떠냐고 묻고, 또 묻는다. 그래서 한강 소설의 분위기는 슬프고, 어둡고, 때로는 비윤리적이기도하다.

소설의 사회적 배경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작가에게 과거의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었느냐, 아니냐는 역사가의 눈높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설은 기록되지 못했거나 희미해진 사건을 작품에 끌어들여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듬고 위로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방점을 두지만, 문학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더 관심이 크다. 그래서 소설은 픽션이다. 개연성보다는 과거에 벌어진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논란은 적어질 수 있다. 문학은 개연성을 상정하고 그것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극한으로, 극대로 몰아가기도 하고, 깨지고 금가는 인간의 처절한 삶을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그 시대의 권력, 지배담론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서양의 고전 《안티고네》도 국가 권력과 개인의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그렸고, 노벨상 위원회도 한강 소설의 그런 유사성을 언급했다. 

한강은 주인공의 불행한 사건을 통해 트라우마를 넓고 크게 파헤친다. 《채식주의자》는 가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4.3사건을 《소년이 온다》는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트라우마로 소환하고 있다. 그녀는 “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쓴다는 건 단지 과거의 일을 쓰는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개인적 트라우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불꽃나무’ 3편의 중편소설이 모여 장편소설이 되는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주인공 영혜의 남편 시선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영혜가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고, 잠을 잘 자지 못하며, 말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혜는 어렸을 때 개에 물렸으며, 아버지는 그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끌고 다니다가 결국 잡아 국을 끓여 같이 먹는다. 공범이라고 느끼는 영혜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한강의 다른 소설에서도 개가 짖지도 못하고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도 인간의 폭력이 이 개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언니네 집들이에서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강압적으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으려는 폭력성을 표출한다.

이러한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란 영혜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한 채 살아왔고, 그녀의 남편도 영혜를 소설의 첫 문장에서 별로 특별하지 않은 외모여서 처음부터 마음에 끌리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고기를 좋아하는 그는 아버지와 치환될 수 있는 존재며, 영혜는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메이드에 불과한 사람일 수 있다.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해 그녀의 가족들은 영혜의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집에 파견한 메이드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정서가 깔려있음을 암시한다.

영혜 가족들이 보기에 그녀가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는 행위는 무슨 귀신에 씌워진 모습처럼 여겨질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기를 먹어보라고 어머니도 애원한다. 영혜는 가족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저항하려고 손목에 자해행위를 한다. 피가 흰 접시 위에 떨어져 선혈이 낭자하고 영혜는 결국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에 입원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병실에서 사라진 영혜는 상의를 벗은 채 병원의 정원에 앉아 있다가 발견된다. 현실 적응실패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할 말을 잊는다.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가 어떻게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그것에 맞설 때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가슴속에 있는 트라우마를 이웃과 이야기하고, 그것을 사회에 공명시킬 때, 그것의 치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트라우마를 밖으로 꺼내 놓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독한 트라우마를 발생시킬 수 있는 가정과 사회는 행복을 제공할 수 없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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