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시작하지만 빚 때문에 용기를 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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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시작하지만 빚 때문에 용기를 내요"
  • 최선경 기자
  • 승인 2013.02.21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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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송이와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
▲ 왼쪽부터 김옥순 할머니와 이송이 양


매서운 한파로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버린 것처럼 삭막한 어느 겨울날 오후, 광천읍 내죽마을에서 모닥불 같은 따뜻한 사연을 만났다. 비록 마룻바닥은 보일러를 넣지 않아 차가운 냉기가 올라왔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고단한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꼬부랑 김옥순 할머니(78)와 예쁜 손녀딸 이송이(20) 양의 삶은 목젖이 뜨끈해지는 감동이었다.

올해 홍성여고를 졸업하고 혜전대학교 간호학과에 진학할 예정인 송이는 소위 말하는 조손가정이다. 송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빠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고, 엄마마저 재혼을 하게 돼 결국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조손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이라 할 수 있는 김옥순 할머니는 아무 탈 없이 잘 자라 혼자 힘으로 대학까지 가는 손녀딸이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보기만 해도 귀여운 손주여. 노인네 핀잔 안 주고 요로콤 말벗도 돼 주고…. 반찬이 있으나 없으나 투정 한번 안 하구, 먹던 숟갈로 밥 멕여줘도 잘 받아먹으니 얼매나 고마운 일이여~"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고 할머니는 홀로 4남매를 키웠다. 그러나 제대로 가정을 꾸려 보란듯이 넉넉하게 사는 자식이 하나도 없다. "이 나이 묵도록 며느리 밥상도 제대로 못 받고 사는 늙은이라고 신문에 날 일"이라며 덤덤하게 얘기하는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환하게 웃는다. "송이 키우면서 힘든 건 없어. 말도 잘 듣고 그러니깐. 다만 돈이 없어서 고생이지. 이것 먹고 싶다, 저것 갖고 싶다고 투정 한번 안 했어. 그게 더 맘이 아퍼" 송이와 할머니는 겨울이면 하루 종일 밭에서 냉이를 캔다. 밭에다 불을 놓고 소매자락 다 끄슬려가며 온 종일 캐 봐야 7~8kg이란다. 한창 냉이값이 잘 나갈 때는 4kg에 2만5000원도 받았다는데 요즘엔 그나마 절반도 못 받는다.

"송이까지 대학교 가르쳐 놓으면 이 세상 떠나도 괜찮아. 어렵게 손녀딸 키워놓고 죽기 바란다고 넘들이 핀잔도 하더구만, 산 세월이 너무 고통스러워 오래 살기 싫어" 송이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지만 자꾸만 몸이 아프신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까 싶어 간호학과를 선택했다. 할머니 걱정하실까봐 내색도 못하고 혼자 힘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등록금까지 마련했다. 송이는 비록 대출로 등록금을 마련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폐도 끼치지 않게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털어놓았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빚쟁이가 됐네요. 빚으로 시작하지만 빚 때문에 산다고 생각할래요. 빚 갚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하잖아요?" 참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미래에 대한 부푼 꿈으로 한창 들떠 있어야 할 청춘에게 못난 어른들이 빚부터 안겨준 것 같아 괜히 죄인 같은 심정이 드는 건 지나친 비하일까? 송이에게 꿈을 물었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란다. 너무 작고 소박한 꿈 얘기에 측은한 마음이 보태졌다.

"얼마 전 장학금을 탔어요. 신나서 할머니한테 막 자랑을 했더니 그 돈으로 보일러 기름을 넣자고 하시는 거에요. '할머니 알아서 쓰세요'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좀 섭섭하더라구요. 다른 친구들 같으면 예쁜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오롯이 자신을 위해 쓸텐데.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생활이 가끔 속상해요" 송이와 할머니는 서로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돌아갈 집이 있고, 그 집에서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는 송이. 고목 껍질 같은 할머니 손을 붙잡아 드리면서, '잘 웃는 호호 할머니와 착하고 예쁜 송이의 앞으로의 일상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넉넉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슴에 안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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