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군의회 의원
“의병이 지고 나서야 역사가 깨어난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홍성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들의 피와 혼이 기록으로 되살아났다. 그 기록의 이름은 《홍양기사(洪陽紀事)》 그리고 이를 남긴 이는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임한주(1871~1954) 선생이다. 그는 총 대신 붓을 들었고, 그 붓으로 조국의 저항과 민족의 정신을 종이 위에 새겼다.
임한주 선생은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아버지 임노직에게서 가학을 배우며 학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김복한, 이설 등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성리학을 배우며 철학적 소양을 다졌고, 특히 한원진의 호론학파를 계승해 유교적 가치와 민족주의 사상을 결합한 독자적 철학 세계를 형성했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히던 암흑기였다.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던 이 시기,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넘어 민족의 이론적 독립 기반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민심은 요동쳤다. 이를 계기로 충청도 홍주 지역에서도 일본에 맞선 홍주의병이 봉기했다. 이 투쟁에 임한주 선생 역시 참여했으며, 김복한, 이설, 전양진 등과 함께 홍성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의병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주목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의병 부대는 3일 만에 무너졌고, 많은 의병이 체포되거나 희생됐다.
그러나 여기서 임한주 선생은 붓을 들었다. 무너진 의병의 뜻을 잇고, 이 투쟁의 의미를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그의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홍양기사》이다. 이 책은 1895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친 홍주의병의 전투, 지도자들의 활동, 고난의 여정을 상세히 담은 기록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
《홍양기사》는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의 정신사, 의병의 철학, 후대를 위한 유산이다. 특히 의병 지도자들의 행적을 세세히 담아내며, 그들의 이름과 뜻이 세월에 지워지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기억되지 못한 저항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 앞에 새겼다.
임한주 선생의 기록 정신은 《홍양기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변집(笆邊集)》이라는 또 다른 저술을 통해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초와 유교적 민족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적 성찰을 넘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정신적 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유교가 단지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시대적 책임을 실현하는 철학임을 보여줬다.
임한주 선생의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울림을 전한다. 그는 말한다. “정신이 독립하지 않으면, 몸이 독립해도 의미가 없다.” 그의 저서는 바로 이 정신적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메시지다. 의병이 총을 들었다면, 임한주 선생은 붓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우리에게 ‘잊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홍양기사》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기록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며, 나라를 지키는 마음을 다지는 거울이다. 의병은 짧은 시간에 무너졌지만, 그 정신은 임한주 선생의 기록을 통해 살아남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기록을 잊지 않고, 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