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조운선 씨
꾸준함의 미학, 예술로 답하다
[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결성면 출신의 조운선(86) 씨는 자신을 “평균적인 능력을 가진 시골 사람”이라 소개한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라가 보면, ‘평범함’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예술적 감수성과 끈질긴 성실함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예술로 확장시켜 왔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교직 생활 35년, 그리고 그보다 더 길었던 창작의 시간을 지나 오늘도 붓을 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자연을 바라보며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 세상의 경쟁보단, 나만의 속도로 걷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 앞서 직접 작성한 글을 건넸다. 일종의 ‘자기 사고(思考) 소개문’이자, 삶의 자세를 압축한 기록과도 같은 글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골 태생으로 지적 능력이나 손재주 등 평균적 수준보다 약하게 태어났다.”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서 꾸준히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떠난다. 무엇이든 혼이 담긴 것을 남기고 떠나심이 어떠한가.”
“나는 그림 작품, 예쁜 돌멩이, 조개껍데기까지도 모아두고 애착을 느낀다.”
또, 그는 자신을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에 비유했다. 빨리는 가지 못하지만 꾸준히 걸어왔고,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 미술이 이끈 삶에서 본질을 찾다
그는 중학생 시절,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미술부 활동을 하며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공부보다는 그림이 적성에 맞았어요. 사범대 미술과는 실기 위주로 뽑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지, 영어·수학 시험이었으면 떨어졌을 겁니다. 허허허.”
조운선 씨는 전남 광주사범대(현 교육대) 미술과를 졸업한 뒤, 갈산중·홍성여중·광천여중 등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특히 홍성여중에서는 10여 년간 학생들과 함께하며 미술교육의 뿌리를 다졌다. 1965년 교직에 입문해 2000년 정년 퇴임까지, 35년간 이어진 교직 생활은 그에게 ‘예술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한 시간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너희들을 화가로 만들고자 미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작품을 감상할 줄 알고,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미술교육의 목적이다.”
조운선 씨의 주된 창작 분야는 풍경화다.
“그린 지 얼마 안 됐을 땐 복잡하게 그리지만, 계속 그리다 보면 점차 단순화됩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자연의 미(美)를 함축하고 단순화해 본질에 다가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이란 세로와 가로의 제한을 받는 평면 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이도록 나타내는 것”이라며, 특히 ‘자연미’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았다.
또, 그는 자연의 인상을 포착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추상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을 ‘진실되지 못한 작품’이라 여겼고, 보이는 것에서 미적 감동을 얻고 이를 표현하는 즐거움으로 삶을 채워왔다.
■ 중년의 발견, 국악기와 붓글씨
40대에 접어들며 그는 새로운 예술세계와 만난다. 단소를 시작으로 대금·피리·태평소 연주와 서예·서각·목공예 등 다채로운 분야로 뻗어나갔다. 그는 “내가 어디에 취미가 있나, 소질이 있나”하고 고민하던 청소년기에 그림에서 적성을 발견했듯, 중년에는 또 다른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집중을 못 하길래 단소를 한 번 불어봤어요. 내 교실뿐 아니라 옆 교실에서도 박수갈채가 쏟아지더라고요. 그 뒤로는 학생들이 떠들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면 심심찮게 단소를 불었어요.”
이후 그는 홍주문화회관에서 열렸던 대금 연주가 ‘이생강’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대금 소리에 매료돼 대금을 손에 잡았고, 나아가 피리와 태평소까지 익히며 국악기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기자가 관악기의 매력을 묻자, 그는 “청아한 소리와 단순함, 그리고 연주할 때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조운선 씨는 45세 무렵부턴 단소를 직접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길을 지나가면 대나무를 유심히 봅니다. ‘이거 단소감이다’ 싶은 게 있어요.”
서예(붓글씨)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처음에는 미술 교사로서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취미였지만, 정자·행서·해서를 두루 익히는 과정에서 그는 서예가 인내심과 도덕성, 그리고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꾸준한 노력’과 ‘붓을 수직으로 잡는 올바른 자세’를 꼽았다. 또한 “붓을 잡는 자세가 사람의 마음가짐 또한 바로 잡아준다”며 “입시 중심의 교육보단 인간의 정서를 기르는 교육이 먼저여야 한다”고, 예술 교육의 가치를 강조했다.
■ 예술의 의미와 보존의 철학
조운선 씨는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세계일화(世界一花)’에 특히 애착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여기에서 세계일화란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뜻으로,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불교 용어이다. 수덕사 故 만공스님의 법어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의미 역시 이와 연결된다. 그의 예술관은 개인의 행복, 그 이상의 영속적인 가치에 닿아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왔다가 가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나 그 사람이 만든, 영혼이 담긴 작품은 남습니다. 그게 무형유산, 글, 그림, 영화일 수도 있죠. 짧은 인생 살다 그냥 떠나지 말고, 무엇이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용운 선생이 독립운동뿐 아니라 시를 썼기에 이름이 오래도록 남아 있음을 예로 들며, 예술은 한 인간이 죽어도 그 흔적을 보존하는 의미 있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의 삶의 철학은 ‘보존’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좋은 예술품, 예쁜 조개껍질까지 모아두고 아끼는 습관은 그가 늘 주장하는 “무엇이든 자기의 흔적이나 혼을 남기고 떠나심이 어떠하신지요”라는 메시지와 궤를 같이한다.
■ 지역사회와 젊은 예술가들에게
조운선 씨는 지역예술인들이 겪는 ‘창작 공간의 부족’을 아쉬워하며, 행정적 뒷받침을 통해 예술혼이 자유롭게 꽃필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마련해야 함을 역설했다. 구체적으로는 군청 이전 이후 현재 군청 건물을 예술인 창작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논의되길 기대했다.
이어 젊은 예술가들에게 주저하지 말고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소극적인 자세보단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번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되도록이면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어느 정도 준비되면, 나중에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마음이 생기면 그때 바로 시작하세요.”
아울러 예술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자신의 의지’ 즉,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오늘 텔레비전 보니까 100세 드신 양반이 그림을 그리시데”라며,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하는 끈기를 에둘러 강조했다.
조운선 씨의 궁극 목적은 언제나 ‘정서 생활의 풍요로움’이었고, 이는 그의 교육 철학과도 일맥 한다. “미술을 감상할 줄 알고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가르침처럼, 그는 메마른 마음을 예술로 어루만지고 채우는 것이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신념을 붓과 물감, 나아가 그가 다룰 수 있는 모든 예술적 도구를 통해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