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그는 하루 종일 그랬던 것처럼 칠판에 128-2라고 적고는 가스통을 들어 오토바이 뒤에 싣고 밧줄로 잡아맸다. 바로 옆 슈퍼를 힐끗 보니 아저씨 혼자 졸고 있었다. 왕순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문을 잠그고 오토바이에 매달아 놓은 카세트를 틀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경쾌한 음악이 쾅쾅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왕순은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기어를 넣고 액셀레터를 힘차게 제켰다.
1인2역을 하느라 꽁지가 빠지는 처지를 잊은 듯 왕순은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거리를 질주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음악소리를 듣고 돌아보다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면서 왕순은 스포츠카를 모는 재벌2세나 된 것처럼 으쓱거렸다.
변두리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서울시내라고 이 동네도 항상 분주했다. 산동네로 오르는 비스듬한 언덕길에는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제나 "최신 테이프 입수"라고 문 앞에 써 붙여 놓았지만 실상은 오래전 개봉관을 지나 TV에도 상영된 영화 테이프들밖에 없는 비디오 가게, 힐끗 스쳐 본 유리창엔 오래 전에 동네 극장에서 본 선정적인 영화 포스터가 내걸려 있었다. 그 옆은 미장원. 출입문을 다 덮을 정도로 큰 사전은 서양여자 사진이었다. 몇 단은 안 빗은 것처럼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왕순은 이해할 수 없는 게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꼴을 멋있다고 생각하는가봐.' 아닌 게 아니라 창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안쪽엔 손님은 하나도 없고 아가씨 혼자 하품을 해대며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바로 옆은 복덕방이었다. 비교적 자식 잘 두어서 이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노인네들이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는 이 동네 노인정 같은 곳이었다. 나이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가끔씩 삿대질 하며 싸우는 소리로 근처 젊은 사람들의 심심찮은 구경거리를 만드는 곳이었다.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왕순은 금세 128번지에 도착했다. 골목 입구에서 머지않은 곳에 파란대문집이 있었다. 문패를 보니 128번지 2호라고 써있었다.
"삐익-"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네. 가스 배달 왔습니다."
아무 말 없이 대문이 찰칵 하고 열렸다.
'제기랄! 기계하고 말하고 기계한테 조종당하는 기분이군.'
그는 오토바이 뒷켠에 실은 가스통을 내려 어깨에 짊어지고 대문을 들어섰다.
"앗!"
왕순은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살이 불거져 얼굴이 온통 빨래처럼 구겨진 불독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릉 대고 있었다. 저승사자라고 저렇게 생겼을까싶은 모습으로 녀석은 왕순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순은 '내가 누구냐. 이 왕순이가 저까짓 불독 한 마리에 떨 놈이냐.' 중얼거리며 숨을 한번 크게 들이 쉬더니 두 눈을 까뒤집어 허옇게 뜨고 입을 옆으로 길게 벌려 이빨을 드러내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기고만장하던 녀석이 거짓말 같이 눈빛이 기가 죽으면서 슬그머니 돌아서서 꼬리를 감추었다.
"개새끼! 놀라기는." 왕순은 으쓱해져서 헛기침을 하며 불독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아저씨 꼭 유덕화 닮으셨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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