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 동네도 정이 들었군.'
오갈 데 없는 처지로 이 동네에 발을 들여놓은지도 어느덧 5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 동네에도, 자신의 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서있는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빽빽한 주택가도 예전엔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터였는데, 어느 샌가 하나둘 집들이 들어서더니 좁던 골목길도 차들이 드나드는 길로 넓혀지고 자가용 승용차도 자주 눈에 띄는 동네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저 위로 올려다 보이는 달동네 판자촌뿐이었다.
처음 이 동네로 오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변두리 동네로 찾아 이곳으로 오던 그날 밤, 왕순은 하늘 높이 깨알같이 매달린 불빛들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었다.
'저게 뭘까?'
크리스마스만 되면 고아원 앞뜰 전나무에 다투어 달던 색색의 불빛 같은 그 불무더기를 보며 왕순은 이 동네에 대해 얼마나 아름다운 환상을 가졌던가. 그러나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왕순은 화려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허탈한 기분이 되었었다. 더욱이 막 취직한 신문 지국의 배달부 일로 산동네를 올라가보게 되었을 때, 그 퀴퀴하고 썩은내 나는 벽마다 피어오르던 곰팡이와 때에 절은 아이들의 누렇게 뜬 얼굴을 보며 아직도 세상을 모르는 자신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게 되었었다. 지난 5년 동안 왕순은 무섭게 일을 해왔다. 연탄배달부, 중국집 주방보조, 신문팔이, 우유배달 등. 인기척 하나 없는 새벽부터 밤 한두 시까지 뼈에 사무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독히 몸부림을 쳐 온 것이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왕순은 휘파람을 불며 즐겨 앉아 쉬는 벤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 저게 뭐야?"
저만치에서 시커먼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퍽퍽 둔탁한 소리에 섞여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왕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현우 또래만한 녀석 서넛이 한 학생을 둘러싸고 린치를 가하고 있는 모습이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왕순이 한걸음 다가섰다.
"잠깐!"
린치를 가하던 녀석들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건."
"쟈스트 모멘트" 잔뜩 혀를 굴리며 왕순이 목소리를 깔았다.
경우는 갑자기 발길질이 멈추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뜨뜬미지근한 것이 입술위로 흘러내려왔다. 주먹으로 훔쳐내어 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고개를 드는 바람에 코에서 흐르던 피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역겨웠다. 아까 그 골목에서 제일 먼저 얻어터진 배가 이제야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지체 높은 스승님께 사사 받은 무술이라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했다만 가진 힘을 부정한 데 쓰는 너희들을 보니 참을 수 없군."
갑자기 나타난 왕순이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웃통을 벗어 제켰다. 달빛에 앙상한 갈비뼈가 선명히 드러났다.
"얍!" 왕순이 중국 무술영화에서 본듯한 동작을 취하며 기합을 넣었다. 린치를 가하던 녀석들이 긴장한 듯 자세를 바로잡으며 왕순을 사이에 두고 둘러섰다. 그러나 어설픈 왕순의 동작을 금방 알아본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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