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탁 위에 출석부를 세워 두 손으로 잡은 채 강선생이 말했다.
"자.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저기 빈자리로 가서 앉아라."
강선생이 진영의 뒷자리를 가리키며 현우에게 말했다. 그러나 현우는 아무 말 없이 강선생이 가리킨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처음 전학 온 학생에게서 수줍음 섞인 인사를 기대하던 아이들이 침묵을 깨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건방진 녀석인데.."
"괴짜 하나 들어왔군."
조용하던 교실이 수군대는 아이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아. 조용. 조용히. 자, 조회를 시작하자."
강선생이 출석부를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먼저 학교에서 사고치고 쫓겨난 놈이라 골치깨나 썩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을 못한 듯 강선생의 얼굴에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강선생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를 미루었다. 이럴 땐 모른척하고 넘어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 몇 년 안 되는 교직생활에서 터득한 불문율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표정하게 앉아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던 현우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진영의 호의 어린 미소와 마주쳤다.
"반갑다. 나, 김진영이야."
현우는 진영이 모범생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짧게 깎은 앞머리 밑으로 드러난 이마는 툭 튀어나오고 여드름 자국이 듬성듬성한 창백한 얼굴에 띠는 웃음이 천진스러웠다. 그런 진영의 호의가 싫지 않은 듯 현우가 가병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왕순은 오래된 한옥집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문이 열려 있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안집인 것으로 추측되는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부엌과 방들이 ㄷ자를 이루고 늘어서 있는 집이었다. 키 작은 동백나무, 측백나무 몇 그루를 심은 화단이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마당에서 대여섯 살쯤 되는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가스 왔습니다."
가스통을 동여 맨 밧줄을 풀고 "으이차" 짧은 기합을 넣어 어깨에 올려 멘 왕순이 안으로 들어서자 가스를 주문한 듯한 중년 여자가 대청 옆방에서 나왔다.
"저기 장독대에 올려주세요."
여자가 장독대로 오르는 대문 왼쪽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심해요. 장독이 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한 왕순은 휘파람을 불며 장독대로 올라갔다. 갑자기 왕순의 얼굴이 굳어지며 다리가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섰다. 장독대 바로 옆의 열린 창 안으로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여자는 옷을 갈아 입고 있었던지 브래지어 차림으로 서 있었다. 왕순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인기척을 느낀 아가씨는 뒤돌아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가스통을 짊어진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있는 왕순과 눈이 마주쳤다. 왕순이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웬일인가! 아가씨가 씨익 눈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창 쪽으로 다가서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왕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저 말이에요?"
왕순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손짓을 했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방아찧는 소리마냥 크게 들렸다. 왕순이 제정신을 잃은 듯 손을 떨며 가스통을 내려놓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