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하지마. 난 그렇게 값싼 아이가 아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가 아니라구."
억지로라도 붙잡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억지로 감추고 쌀쌀한 표정으로 종호의 손을 뿌리친 미라는 종종걸음을 치며 집으로 향했다.
2교시를 끝낸 남자 아이들이 갑자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항상 여학생들 차지이던 교실 뒤쪽 거울로 달려가 머리를 빗는다, 구겨진 남방 깃을 편다,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밥맛이야. 걸레가 빤다고 행주 되냐?"
그런 여학생들의 비웃음에는 아랑곳 앉고 남학생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서로 경쟁하듯 거울앞을 차지하려고 이미 밀치고 저리 밀쳐댔다.
"왜들 저래?"
의아한 표정으로 현우가 진영에게 물었다.
"영어시간이야."
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현우가 다시 물었다.
"영어선생님이 굉장한 미인이거든. 아마 우리 학교 안에서는 두 번째로 예쁠거야."
진영이 꿈꾸듯 눈을 가늘게 뜨고 천정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두 번째? 첫 번째는 누군데?"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현우가 물었다.
말없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진영의 눈길을 따라 바라본 현우의 눈에 어수선한 교실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유일하게 말없는 여학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짧은 단발머리에 수수한 복장이었지만 투명한 피부와 오똑한 코가 돋보이는 아이였다. 흠이 있다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왠지 어둡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현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볼 때까지 진영은 넋을 잃은 듯 그 여학생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그 여학생이 눈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진영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현우는 그런 진영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띠었다.
수업종이 울렸다.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제자리를 찾아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잠시 후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잠잠한 교실에 민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문득 바라보던 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학을 갓 졸업한 듯 화장기 하나 없는 앳된 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현우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간 마른 듯한 몸매, 하얀 얼굴의 웃는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꼭 닮았다고 생각되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현우의 뚫어질 듯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마기 없는 단발머리를 손으로 한번 쓱 쓸어올리며 그녀는 교실 안을 둘러보다가 교실 뒤쪽에 눈길을 멈추었다. 미소를 지으며 뒤로 향하는 민선생의 걸음을 따라 아이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뒤쪽으로 쏠렸다. 맨 뒷자리 바로 뒤로 간 그녀가 잠시 허리를 굽혔다가 일어섰다. 얼굴 가득 웃음을 담은 그녀의 손에 파란 남자용 빗이 들려 있었다.
"누가 바닥에 떨어뜨렸나 보구나. 교탁 속에 놓아 둘테니 수업시간 끝나고 찾아가도록 하렴."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