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현우는 가방을 고쳐 메고 언덕을 내려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 말했었다.
"좀 사람다운 짓을 하겠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청자켓이 화를 냈었다.
"저 새낄 그냥-"
청자켓이 분에 겨운 듯 달려 내려가려고 하다가 종호의 눈짓에 멈칫 하고 돌아서서 욕설을 내뱉었었다.
"셋이 한꺼번에 덤벼서도 꼼짝 못하는 녀석들이 무슨 잡소리야?"
종호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소리쳤었다.
방과 후에 잇었던 일을 생각하며 멍하니 걷고 있는 현우 옆으로 갑자기 오토바이가 급하게 멈춰쉈다. 놀라서 쳐다보는 현우 앞에 특유의 모자라는 듯한 웃음을 띤 왕순이 오토바이 위에서 장난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난 또 누구라구. 배달 갔다 오는 거야?"
현우가 오토바이 뒤쪽에 실린 빈 가스통을 살펴보며 말했다.
"며칠만이냐? 어디 보자. 때깔이 좋아진 걸 보니 역시 라면보다는 밥이군."
위아래로 현우를 훑어보며 왕순이 웃었다.
"어디 가는 길이냐?"
이 동네 올 일이 형 만나는 일밖에 더 있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은 한다는 듯이 현우가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그래, 빨리 가자. 책가방은 이리 주고."
책가방을 뒤에 실은 왕순이 악셀레이터를 힘껏 잡자, 오토바이가 출발했다. 빈손이 된 현우는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왕순의 가게에 현우가 도착해보니 이미 가스통을 내려놓은 왕순이 사이다 한 잔을 내밀었다.
"숨차지? 한 잔 마셔라."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던 현우가 사이다를 받아 쭈욱 들이켜며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들어간 탄산성분이 가슴 속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아직도 못 구했어?"
현우가 가게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냐. 너만한 녀석 하나가 들어왔는데, 배달 나갔어."
왕순이 대답하며 현우가 비운 잔에 사이다를 따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학교생활은 어떠냐? 이번엔 조용히 지내고 있겠지?"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크"소리를 내뱉고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왕순이 물었다.
"조용할 것 같진 않아.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녀석들이 있는데…"
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이야기하던 현우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왕순씨이-"
유리문이 열리며 장미꽃을 한 다발 든 미애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 그래?"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왕순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싸쥐었다. 어젯밤 꿈에 돼지가 보이 길래 복권이라도 한 장 사두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내 팔자야, 세상에 쌔고 쌘 게 여잔데, 하필이면 불어터진 하마 같은 여자가 걸릴 게 뭐람.'
지난번엔 간신히 도망쳐 나왔는데, 오늘은 이 좁은 가게까지 쳐들어 왔으니 꼼짝없이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미애는 그런 왕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몸을 꼬아댔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