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문(三問)과의 대화 - 노은단(魯恩壇)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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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三問)과의 대화 - 노은단(魯恩壇)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11.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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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23>

 


참되고 밝은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 답을 듣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적어도 세 번의 물음이 필요합니다
하루가 시작되고 또 하루가 시작되기까지
꼭 필요한 물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닭재산 닭울음소리 들리기 전
오로지 자신에게만,
수없이 묻고 또 답해야 합니다
삶이란, 존재하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행하는 것
행하는 그 사실 그대로 숨김없이,
확실하게 하는 것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물음에 답할 일이 아닙니다
뜻으로 이리 저리 헤아려
함부로 답을 얻으려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아침 풀잎의 참[眞] 이슬이
밝은 빛에 쉬이 목숨을 버리듯
오르지 물음에 대한 답은
가장 가까운 제 목숨 하나
가벼이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삼문(成三問)은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는 소리가 3번 들려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는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에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고 다짐한 후 받은 녹봉을 월별로 표시하여 별도로 쌓아둔 채 단종복위운동을 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 때 왕의 운검(雲劒 :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으나, 한명회가 갑자기 운검을 폐지하여 실패하고, 김질의 밀고로 모두 체포되었다.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형되자,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은 것이 오늘날의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다. 또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남 은진에,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 강원도 영월 창절사(彰節祠), 서울특별시 노량진 의절사(義節祠), 충남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고, 그가 태어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魯恩壇)이라 하였다. 노은단은 1984년 5월 7일 충남문화재 자료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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