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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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35 >
  • 한지윤
  • 승인 2013.12.1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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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미안해요. 오토바이에 걸려 문이 안 열리길래 발로 살짝 밀었더니…"
벌러덩 누운 채 말하는 미애의 얼굴은 천연덕스러웠다. 보통사람이라면 크게 다쳤을텐데 여유만만한 걸 보면 몸의 탄력성이 한몫 한듯 싶었다.
"오토바이가 괜찮나 모르겠네."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오토바이를 쳐다보며 미애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토바이는 괜찮을텐데. 아가씨나 어서 일어나 봐요."
걱정을 담은 왕순의 말에 미애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저 믿음직한 태도. 내가 남자는 참 잘 골랐어.'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며 일어나기 위해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힘을 주며 기를 쓰는데도 허리가 앞으로 굽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새 모여선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 웃지들 말아요. 자, 내 손 잡고 일어나 봐요."
남의 불행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답게 왕순이 구경꾼들에게 핀잔을 주며 미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애는 그런 왕순의 호의가 하도 고맙고 기뻐서 하마터면 엉엉 소리 내어 울뻔했다.
'어쩜, 매너 하나 끝내 주는 남자야.'
걱정스런 얼굴로 내미는 왕순의 손을 신주단지 만지듯 잡는 미애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나, 둘, 셋."
제가 무슨 백마 탄 기사라도 된 양 양순이 기합을 넣으며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야야! 팔 빠져요."
미애가 꼼짝달싹 않은 채 누워서 소리를 질러댔다.
"좀 살살. 부드럽게 잡아당겨 주세용-"
엄살이 좀 지나쳤다 싶어서인지, 아니면 왕순이 손을 놓아버릴까 봐 걱정이 되어서인지 미애가 실눈을 하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왕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왕순은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한 번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어어--" 비명소리와 함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껴졌다. 왕순은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기는 힘을 버텨내기 위해 다리에 온 힘을 주었다. 그러나 몇 초 못가서 중심을 잃고 엎어지고 말았다.
"거. 대낮부터 뭐하는 건가. 젊은 사람들이."
슈퍼마켓 아저씨가 완전히 포개어진 두 사람을 안경너머로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수미는 양동이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소매 끝으로 이마를 훔치자 흥건한 땀이 배어나왔다. 벌써 며칠째 이렇게 물을 길어 나르고 있는데도 말라버린 수도꼭지에선 물 한 방울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해지기 전에 빨리 길어 날라야지. 쉴 틈이 없다."
옆집 순미 엄마가 역시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를 양손에 들고 바삐 올라가면서 수미를 재촉했다. 며칠 전까지 아프다고 누워있더니 어느새 일어나 저렇게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다. 사람을 지독하게 다그치는 가난의 위력은 다 죽어가는 반송장에게서도 천하장사 뺨치는 힘을 빼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동네 여인들은 그 산증인이었다. 용석이 엄마도, 순미 엄마도 막일 하다 다치거나 병든 남편 대신 새벽 4시부터 노가다 일을 나가기 위해 몸빼를 둘러 입고 서두르는 사람들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밤낮으로 뛰긴 했지만 잘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몸이 오래 갈 리가 없었다. 남편에 뒤이어 아내도 눕고, 그러다가 굶고 있는 자식들 꼴을 볼 수 없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길 거듭하며 병을 키우는 게 그들의 생활이었다. 수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양동이를 들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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