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자신을 파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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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자신을 파괴하라
  • 범상<칼럼위원>
  • 승인 2014.01.0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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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기대와 설렘이다. 새로운 각오와 활기찬 희망이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덕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음속 깊이 다짐했던 계획들은 현실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여태껏 이어오는 습관과 타협하여 다음으로 미루기 일쑤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항공대 최봉영교수는 태양(太陽)은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만물에게 ‘~을 하게하다’, ‘~을 해라’, ‘~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다’ ‘해라’라는 뜻에서 ‘해’라고 불리며 ‘달[月]’은 한 달을 주기로 매일매일 변하는 모양이 마치 저울의 눈금처럼 하루하루를 (무게)달아보는 것 같다하여 ‘달다’라는 의미에서 ‘달’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위를 근거하면 새해의 어원은 ‘새로운 해가 떴다’가 된다. 이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해는 아침마다 떠오르므로 매일 매일이 새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새해는 1년을 12달로 구분되는 날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가 나에게 공급하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달이 날을 달아(재어) 보듯이 하루를 돌이켜보고 다가올 내일을 가늠해 보는 삶을 살아 갈 때 새해가 온전해지고 연년으로 이어지는 삶이 완성되어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 일체 만물들은 싫든 좋든 간에 변해가므로 새해를 변화라는 말로 대신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여기에 대해서 붓다는 본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을 윤회라 하고 본능이 일으키는 갈애(渴愛)를 극복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윤회는 고통의 연속인 반면 수행은 고통이 소멸된 뒤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본래의 면목이라 하겠다.
윤회든 수행이든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난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따스하고 편안한 즐거움에 빠져서 게으름뱅이로 사는 것을 윤회라 한다면 이번에는 건강이라는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은 수행이라 할 수 있겠다.
만해 한용운은 새롭게 변하는 것을 유신(維新)이라고 말하고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들을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중략-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이처럼 파괴란 과거의 악습을 타파하는 것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저열함을 극복하는 용기로서 변화가 크고 빠를수록 새로움은 일찍 다가오고 크게 얻어진다고 역설한다.
현실에서 유신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유신의 마지막 힘마저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서민의 가난과 영구집권의 독재가 언제나 함께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유신을 요구하지 않으면 권력의 변화가 없을 것이며 정치의 변화 없이는 국민들은 행복을 기대 할 수 없다.
현재 우리사회는 거시적으로 보면 60여년을 지속해온 ‘좌파빨갱이논리’와 지역감정 등을 기반으로 하는 대선부정이나 공기업민영화와 같은 비민주 비서민정책들을 파괴해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공동의 이익보다 개인의 출세를 우선하는 ‘출세지향적개인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결코 자신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아 유신 즉, 파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새해에는 개인의 파괴가 나라의 유신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며 독자님들의 가정에서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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