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은 이름 다 두고 빨간 무가 뭐야, 빨간 무가.”
하지만 이름이 좀 후졌어도 사람만 잘 걸리면 장땡이라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재민은 하느님을 불러댔다.
“빨간 무가 누구냐?”
킥킥대로 웃는 소리에 재민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택이 남은 두 남자애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민은 얼른 맞은편의 두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둘 다 빙그레 웃고 있어서 누가 자기 파트너인지 알 수 없었다.
“노란 무의 파트너, 빨간 무가 누구야?”
재민은 두 여자애의 손을 보려고 했으나 누가 쪽지를 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야.”
운명에 맡기자는 심정으로 재민이 힘없이 쪽지를 내밀었다.
“어머, 반가와요. 내가 노란 무에요.”
에그머니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프로레슬러가 벌떡 일어나더니 넙죽 손을 내밀었다. 재민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등골이 오싹해져왔다.
“악수하자구요.”
재민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푹 찌르면 살이 쑥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피둥피둥한 손이었다.
“네...네.”
재민은 울상이 되어 손을 내밀었다.
“아야!”
재민의 비명소리에 다른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쪽을 돌아다보았다. 재민은 악수를 푼 뒤 시뻘개진 손을 흔들어대며 펄쩍펄쩍 뛰었다.
“어머, 아팠어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힘이 없어요?”
프로레슬러는 껄껄 웃으며 재민의 앞으로 와 마주 앉았다. 자리에 앉은 재민은 식은 땀을 흘리며 옆을 쳐다 보았다. 모두들 만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떠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경우를 보았다. 뭔가 얘기하고 있는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식. 안 나오겠다더니 이쁜 여자애 앞에 앉으니까 그저 침을 질질 흘리는구나.”
“내 이름은 왕강순이에요.”
체격에 맞는 우렁찬 목소리로 강순이 말했다. 재민은 곰보빵 두 개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워버리는 강순의 엄청난 먹성에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강순이라고 지은 줄 알아요? 튼튼하게 잘 살라구 우리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강순은 입안 가득히 들어찬 빵을 우물거리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할아버지는요, 여자가 몸이 약하면 집안이 망한댔어요. 그래서 내가 가끔 밥맛이 없어 밥을 두 그릇만 먹으면 막 화를 내세요.”
재민은 연방 빵을 집어넣으면서도 말이 끊이지 않는 강순의 모습을 반쯤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다.
“꿈에 분명히 개가 나타났을거야.”
경우는 앞에 앉은 여학생의 이름이 윤선희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노 연주가 특기라는 것도, 어머니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도.
“경우씨는 어머니와 친하나요?”
선희가 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물었다.
“네. 조금..”
말을 얼버무리는 경우의 머릿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