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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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보내며
  • 범상<석불사 주지, 칼럼위원>
  • 승인 2014.03.0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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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를 따라 여행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충절의 고장’임을 알리는 안내판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충절의 고장’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홍성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홍성사람들은 ‘충절의 고장’이라는 말에서 자긍심을 느끼고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뿐만아니라 다른 고장에 비하여 인물이 많은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재까지 많고 많은 인물 중에 단 한 분에 대해서도 선양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일각에서는 선양할 인물이 너무 많아 어느 한 곳에 예산을 집중할 수 없다는 신빙성 없는 궁색한 이유를 대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논할 만큼 홍성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다. 다만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친 홍주의병 그리고 3․1만세운동과 파리장서운동의 본거지였던 홍성의 항일정신과 기개는 일본과 그 추종세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지 않았겠느냐하는 나름의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예를 들면 1986년 홍주의병유족회에서 발간한 ‘홍주의병신록’은 높은 자료적 가치와 주관이나 사견을 피하는데 힘썼다는 집필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은 모호하다. 이것은 최근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건’에서 보듯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근현사의 문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본다.
각설하고, 우선 충절(忠節)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충절은 충서(忠恕)와 절의(節義)를 말한다. 충서와 의(義)는 공자의 인(仁)에서 출발한다. 공자는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으면 남도 이루어지게 해주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고 말하고 인의 적극적인 실천을 충(忠)이라 하며 소극적인 면을 서(恕)라 했다. 그리고 의(義)란 어떤 상황의 당위성을 뜻하는 무상명령(無上命令)으로써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로서 의와 인은 남을 사랑하는 형식과 실천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후대에 와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입장에서 ‘의(義)란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 충(忠)이란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 효(孝)란 부모를 이롭게 하는 것, 공(功)이란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이처럼 충(忠)과 의(義)의 입장에서 절(節)이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신념으로써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행동과는 구별되어지며 충과 의 역시 공으로 귀결될 때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불교를 종(宗)으로 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방편(方便)으로 하여 인류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려 했다”고 평가되는 만해 한용운 선사야 말로 홍성이 말하는 충절의 고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세동점과 일제식민지 시기에서 크게 다음과 같이 3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스스로 민족을 미개하다고 보고 서양을 배우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진화론자와 둘째 일본은 밉지만 일본을 본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사회진화론의 변형인 아시아주의를 변절의 근거로 삼았던 사람들, 셋째 설령 다른 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이익이 된다하더라도 자유가 박탈됨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부국강병을 이루어 열강의 대열에 나가야한다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했던 만해 선사 등이다.
이제 오욕의 과거사를 정리하고 후손들을 위해서 충절의 고장이요 독립운동의 시원(始原)이며 3․1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만해 선사의 고향인 홍성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지고 있는 홍성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2011년 구제역 파동으로 중단된 만해 생가지에서의 3.1절 행사를 올해도 치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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