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을 찾아]박명배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 제 55호, 홍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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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을 찾아]박명배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 제 55호, 홍성읍))
  • 서용덕 기자
  • 승인 2014.05.01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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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랑방·로마 교황청에도 그의 가구가 있다

10대 부터 옛가구 재현 몰두 소목은 전통가구 제작 분야
소목장 중 유일 무형문화재 국내 양대 공예대전서 대상
전통이란 우리 삶속에서 수백년 다듬어져 이어온것 전통공예 꾸준히 계승할터

목수란 나무를 다뤄 목재 가구나 문방구 등을 제작하는 사람으로 목공 또는 목장이라 부른다. 그 가운데 건축이나 공정을 다루는 대목장과 조각과 가구 등을 전문으로 하는 소목장으로 나뉜다.
전통가구 제작을 일컫는 소목은 전통 공예 가운데서도 활동이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그 가운데 최고라 말할 수 있는 장인을 꼽는다면 박명배(64) 소목장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명배 소목장은 문화재청이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제 55호인 ‘소목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은 유일한 장인이다.
홍성읍 출신인 박 소목장은 홍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집안의 형뻘인 최회권 씨의 권유로 10대 후반부터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최 씨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공예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박 소목장은 공예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현대공예와 목공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박 소목장은 “10대 때 현대적 공예 감각과 목공의 기초를 배워둔 것이 우리 전통이 갖고 있는 미적요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첫 스승은 1971년 어느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박 소목장은 당시 응암동에서 이름을 날린 허기행 씨를 찾아가 전통가구 만드는 기법을 배웠고 1980년 허 목수로부터 독립해 지금의 영산공방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무형문화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옛 가구들을 재현하는데 몰두했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전통가구는 나무를 소재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박 소목장은 기후변화에 따른 나무의 속성에 따라 제작하는 전통적인 안목과 방법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기온차가 뚜렷해 나무의 결이 특히 아름답다. 반면 나무는 수분에 민감해 여름에 늘어나고 겨울엔 쪼그라드는데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의 기후에는 이러한 나무의 속성을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의 전통가구는 작은 판면을 잇대는 ‘면 분할’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제작된다.
“큰 판을 하나로 쓰기보다는 잘게 쪼개 여러 개로 나누면 변형에 강하게 됩니다. 이것이 면 분할이라는 기법인데 자연이 우리에게 이러한 기법을 생각하게 해준 것입니다.”
그는 전통가구가 우리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내려온 것임을 강조했다.
“전통이란 우리 삶과 자연환경에 맞춰 수백 년을 두고 다듬어져 온 것입니다. 근데 이게 먼 훗날 하루아침에 한 두 사람에 의해 바뀔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통은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이어져 왔기에 눈에 익고 마음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전통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적인 감각에 따른 가구 디자인이 소목장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이를 나무로 재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 소목장은 기초를 중히 여긴다. 전통가구 제작에 있어 가장 기초는 무엇일까. 그는 재료인 나무의 선택과 가공을 주저함 없이 꼽는다.
“좋은 전통가구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전통가구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면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활용하는 게 제일 좋지요. 갈라지지 않고 고유의 문양이 잘 나타난 게 좋은 나무입니다.”
전통가구를 만들기 위해선 300년에서 500년 된 나무를 써야 한다. 이런 나무를 우리나라에서 구하기란 쉽지 않다. 산림녹화 정책이 결실을 거둔 것이 30~40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정도 수령의 나무로는 전통가구를 만들 수 없다.
쓸 수 있는 나무는 마을에 있는 커다란 정자나무들 정도 밖에 없다. 그걸 잘라 팔겠다는 마을은 찾을 수 없고 가끔 댐 건설로 수몰되는 마을이나 새로 도로가 나며 잘리는 나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큰 가구 같은 것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10대부터 잡기 시작한 끌과 대패와 인두는 오늘날 그를 소목의 장인으로 있게 한 상징들이다. 그는 처음 목공예 일을 시작한 즈음인 1971년 기능올림픽에서 그의 작품이 수상되면서부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청와대 영빈관의 사랑방 안방가구를 제작했으며 다음해에는 로마 교황청 내 한국관 가구실의 전통가구를 제작했다. 이밖에 운현궁에도 그의 작품이 비치됐으며 로스앤젤레스와 워싱턴, 베를린의 한국문화원 등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박 소목장은 지금은 사라진 동아일보 주최 동아공예대전에서 1989년 대상을 수상했다. 이어 1998년 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칭호를 받았다. 1992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을 포함해 우리나라 양대 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는 박 소목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박 소목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작품 제작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 소목장은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영산공방’이란 작업실을 꾸려 전통 목가구를 만들고 있다. 그는 소목장 이수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한국문화의 집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소목반을 맡아 일주일에 3일을 가르친다.
박 소목장은 “무형문화재는 전통의 기술을 변형 없이 지키는 것에만 있지 않고 이수자 양성 의무도 있다”며 “앞으로도 우리 전통공예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꾸준한 노력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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