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시리즈 3 (친구, 그 비광같은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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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시리즈 3 (친구, 그 비광같은 존재들)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4.11.21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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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에서 비광(雨光)의 모습은 일단 화려하다.
빨간색 도포를 입은 선비가 시냇가 옆에서 초록 우산을 쓰고 마치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터득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그림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모습이다. 유일하게 사람의 모습이 들어 있는 비광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느 강력한 광과는 다르게 3장을 모아도 3점을 만들 수 없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고스톱에서 광대접도 못 받는 이 미운 오리새끼는 심지어 화투 패로 할 수 있는 다른 놀이인 ‘섯다’에서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광임에도 전혀 존재감이 없는 비운의 광이 바로 이 비광인 것이다.
하지만 비광은 자신의 불우한 출신성분과는 반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광이 없으면 오광의 완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 광 3점으로 났을 때, 나를 광박의 위기에서 지켜줄 수 있는 소중한 수호신이 되기도 한다. 없어봐야 비로소 그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광이 바로 이 비광인 것이다.
내 친구 현부와 상민이는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광같은 존재이다.
꽤 어렵고 힘들었던 유학시절을 밝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함께였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기말고사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각 종 프로젝트의 험난한 과정을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또한 응원했기 때문이다. 모든 과제와 시험이 끝나는 날 밤, 친구들과 함께 마셨던 싸구려 맥주는 세상의 어느 유명 맥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시원했고 달콤했다.
강남에서 꽤 규모 있는 음악 녹음실을 운영하는 현부는 온순하고, 튼실한 기업의 임원인 상민이는 섬세하며, 대학 교수인 나는 뜬금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는 함께 있을 때 거의 무시되곤 한다. 셋의 성격이 뚜렷하게 상반됨에도 별다른 의견대립이나 사소한 말다툼 없이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인내하고, 그리고 존중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항상 주목하는 유일한 화두는 ‘보다 더 재미나고 신나게 놀기’이다. 각자가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는 일과시간 이외에 더 재미나고 신나게 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일과시간에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이후에는 속세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함께 해소한다는 것이 우리 모임의 중심 목표이다.
우리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번개 모임을 한다. 토요일 늦은 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금 놀까?”라는 연락 하나면 각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교적 정확한 시간에 약속 장소로 모인다.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지내야 하는 토요일 밤에 집을 빠져 나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 중 최고의 난관은 팔짱끼고 도끼눈을 부라리며 감시하고 있는 아내에게 외출을 허락 받는 일이다. 아내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을 꿇던지 아니면 쓰레기 분리수거 하러 나가는 척하며 집을 빠져 나오던지 그것은 순전히 각자의 몫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로 이태원의 수제 맥주 집을 순례하거나 강남의 스크린 골프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늦게까지 시시덕거리다가 담배와 맥주가 절묘하게 조화된 냄새를 품고 귀가한다. 동이 트는 새벽녘에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집에 들어가다가 본의 아니게 아내의 단잠을 깨워 이른 아침부터 박살나는 것 또한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라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불문율이다.
어느 조직이나 비광같은 존재가 있다. 우리 사회에 이런 비광같은 존재는 정말 중요하다.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없을 때 비로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실감케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없으면 그 조직이나 사회는 절망적인 광박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셋 만으로 이루어진 소중한 모임에서 누구 하나라도 제외된다면, 우리의 모임은 ‘비광이 빠진 오광’처럼 불완전체가 된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우리의 작은 모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비광같은 존재인 것이다. 비광이 있어야 오광의 꿈을 이룰 수 있듯이, 내 옆에는 현부와 상민이가 있어야 비로소 내 존재가 완성됨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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