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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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4.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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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 같은 사극 드라마를 보면 중앙 관군이 급한 전갈을 전하고자 근육질의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불같은 눈빛의 병사는 갑옷이 출렁거려도 여밀 생각을 못하고 이따금씩 “이럇! 이럇!”하며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숲속의 좁은 길을 달려간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심장도 ‘다그닥, 다그닥’하는 말발굽 소리의 장단에 맞춰 함께 뛴다. 우리의 조선 병사가 어서 목적지에 늦지 않고 도착하여 적의 침략에 만반의 태세를 갖춰 왜군들을 모조리 물리쳐 주기를 바랄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은 그 이전의 장면에 멈춰진다. 정확히 말하면, 병사의 채찍을 맞는 말에 집중된다. 원래 말이란 동물은 달리기를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이럇! 이럇!”하며 말을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빠르게 달려갈 텐데, 굳이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말의 배를 걷어차야만 할까. 혹시 그 말이 관군에게 걷어차여 탈장하거나 내장 파열을 일으켜 하루 종일 달린 그 날 밤 새벽녘에 피똥을 싸면 큰 일 나겠다 싶다. 더 끔찍한 상상은, 혹시 말이 임신중이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생각도 해봤다. 생각이 이쯤 되니, 옛날 관아에 소속된 역마들의 일생이 참 기구하구나 싶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역마살이 또 도졌나보다. 계절이 바뀌자마자 어김없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역마살은 역마와 살이 혼합된 단어다. 역마(驛馬)는 옛 중앙 관료가 공식적으로 타고 다녔던 말이다. 말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당시에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가 먼 길을 달린 말을 역(驛)에서 잠시 쉬게 하거나, 그 역에서 다른 말로 갈아타고 다시 다음 역까지 달린다. 그러니까 관아에 소속된 말은 쉬지 않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끊임없이 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에게도 여러 개의 역마살이 있다. 내가 역마살이 붙어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아마도 군 입대가 몇 달 남지 않았던 어느 해 초여름이었다. 사회에 술을 남겨두고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억울해 모조리 마셔버려야겠다고 결심했던 시기였다. 그 날, 대전에 살고 있는 친구 김대성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그의 집(놀랍게도 그의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다음날 아침 친히 해장국을 끓여주셨다)으로 향하던 중 놀이터에 돗자리를 펴 놓은 오십대 중반의 점쟁이가 눈에 들어왔다. 술집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대전 중심가에, 그것도 번듯한 장소도 아닌 놀이터에, 그것도 신비로운 흰색 한복도 아닌 꼬질꼬질한 남방과 청바지를 입고 있는 이 못미더운 점쟁이에게 점을 한 번 보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나였다.

우리는 각각 오천 원씩 복비(점쟁이는 우리에게 받은 복비 만원으로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 함께 나눠 마시는 최고의 서비스 정신을 보여주었다)를 주고 점을 봤는데, 그날 너무 취해서인지 아니면 그 점쟁이의 점이 신통치 않았는지 어떠한 말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나에게 역마살이 세 개나 붙어 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때부터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느껴질 때, 그러니까 내 연구실의 푹신한 의자가 갑자기 딱딱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이십 년 전의 사이비 점쟁이가 확신한 세 개의 역마살을 떠올리곤 했다.

마흔 몇 살을 넘겨보니 역마살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말이다. 역마살에 이끌려 혼자 떠나는 길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정처없이 길을 떠날 수 있고,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허기를 채워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동차가 있으니 ‘다그락 다그락’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을 타지 않아도 된다. 이쯤 되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푸른 초원을 떠돌던 몽골의 유목민이나, 방랑시인 김 삿갓이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도대체 몇 개의 역마살을 가지고 있었을까. 엄청난 고수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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