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 약도(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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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약도(略圖)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8.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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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이용하여 지리산에서 가족 여행을 계획하였다. 공교롭게도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강원도에서 논문 발표가 있는 나는 가족들을 먼저 지리산으로 보내고 일정이 끝나는 대로 그들에게 합류하기로 했다. 토요일 모든 학회 행사를 마무리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리산 콘도로 출발했다.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휴대폰 내비게이션에 지리산 콘도를 입력했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 했을 것 같은, 혹은 실제로 만나면 꽤나 미인일 것 같은 내비게이션의 아리따운 목소리는 자정쯤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늦은 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이런저런 생각하며 혼자 운전하는 것을 즐기는 나조차도 이번만큼은 쉽지 않다. 지난밤에 마셨던 모든 종류의 술이 아직도 내 뱃속에서 연소되지 못하고 있었고 오랜 운전으로 허리가 뻐근하고 목도 칼칼했다.

목적지를 얼마 남기지 않고 당혹스런 일이 발생했다. 인적 없는 국도에서 갑자기 휴대폰 내비게이션이 꺼져버린 것이다. 초행길에, 그것도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 갓길에 잠시 비상등을 켜고 차를 정지시켰다. 차량용 충전기가 고장 난 것인지 아니면 스마트폰이 문제인지 알 길이 없다. 휴대폰의 시작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는다.

나는 밀려오는 짜증과 피곤함을 애써 누르고 국도를 따라 정처 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계속 직진하다보면 곧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그 마을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충전기를 빌려 휴대폰을 충전할 요량이었다. 한참을 운전하니 저 멀리 작은 마을이 희미하게 보인다. 국도에서 빠져나와 마을로 들어왔으나 편의점은커녕 구멍가게조차도 없다. 작은 산골 마을에 편의점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다시 운전을 시작하였고 몇 개의 비슷한 마을을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문득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파출소였다.

나는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파출소에 들어갔다. 두 명의 경찰관이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휴대폰 충전기를 빌려 충전을 시작했다. 10분이면 콘도에 도착할 만큼의 충전은 될 것이다. 나는 파출소 입구에 있는 진한 갈색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영화에서 보면 고주망태가 된 취객이 누워서 고래고래 행패부리는 그 나무 의자 말이다.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50대 중반의 경찰관이 콘도의 이름을 물어봤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지난 달력을 ‘부욱’ 찢어 뒷장에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파출소에서 조금만 가다보면 사거리가 나오는데요…(중략)…좌회전을 하면 길이 하나로 겹쳐지는데요…(중략)…주유소를 끼고 우회전을 하면…(중략)…” 그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히 섞어가며 거의 이십분에 걸쳐 콘도로 가는 길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났을 때 달력 뒷장은 그가 그린 약도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는 이내 그가 완성한 핸드메이드 약도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했다. 결국 세 번을 복습하고 나서야 그의 설명은 마무리 되었다. 마치 초등학생쯤의 어린 막내 동생을 이 시커먼 밤에 홀로 떠나 보내야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이미 휴대폰이 충분히 충전되었기 때문에 그의 약도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산골 촌부의 순박하고 친절한 정성을 거부할 수 없어 “아, 네. 그렇군요…잘 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하며 그의 진지한 길안내에 추임새를 써가며 경청하는척했다. 감사 인사를 하고 파출소 밖으로 나오니 그 경찰관은 따라 나와 한 번 더 내가 가야할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쪽 보이시죠? 저쪽 끝까지 가시면…(중략)…거기서 좌회전 하면…(중략)…”하며 다시 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차에 올라탔다. 디지털 시대의 첨병인 스마트폰 전원을 누르고 아리따운 목소리의 내비게이션을 익숙하게 켰다. 목적지를 입력하자마자 내비게이션 안내양은 그 시골 경찰관의 긴 설명과는 사뭇 다르게 순식간에 내가 가야 할 길을 맑고 섹시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나는 그 경찰관이 달력 뒷장에 꾹꾹 눌러쓴 약도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미인이면서 똑똑하기까지 한 나만의 내비게이션 안내양의 길안내를 따라 콘도로 향했다. 어찌된 일인지 콘도로 오는 내내 주머니 속에 찌그러져있는 그 순박한 경찰관의 꼬깃꼬깃한 약도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따뜻한 사람의 냄새가 풍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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