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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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이유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03.1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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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가벼운 불면증을 앓고 있다. 이른 초저녁이든 늦은 새벽이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자 하면 어김없이 정신이 똘망해지는 것이다. 낮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잡념들이 불쑥 튀어나와 잠을 방해하기 일쑤다. 쓸데없는 생각이 스르르 고개를 들면 또 다른 생각이 그 뒤를 잇고, 그것과 연결된 또 다른 생각이 땅 속 고구마 줄기 퍼지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식이다. 내 단잠을 저해하는 그 생각들은 구체적인 현실의 고민이 아닌 공상이나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나는 밤의 허황된 상상과 낮의 구체적인 현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음악과 문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열다섯 살에 평생을 음악인으로 살아야겠다는 근거 없는 결심을 했었다. 부모님이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혼자만의 은밀한 밤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갖가지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연주하거나, 당치도 않는 작곡을 했다. 이러한 나름의 음악적인 노력은 새벽 세시까지 이어지는 라디오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청취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음악에 귀가 피로해질 때쯤, 헤세와 보들레르를 읽었다. 이상과 김수영과 박상륭의 작품도 열 몇 살쯤의 사춘기에 읽었다. 베개 두 개를 등 뒤로 높이 쌓아 비스듬히 누워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작은 맥주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옆에 두고 마치 애늙은이처럼 세상의 깊이를 이해한 표정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나갔다. 음악과 책읽기에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동이트기 일쑤였고 아침 일찍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에게 지난밤 숙면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벼운 꾸중을 듣곤 했다. 물론 학교 수업에서 꾸벅꾸벅 졸았고, 중학교까지 꽤 괜찮았던 성적은 음악과 문학에 빠져들수록 반비례하게 곤두박질 쳤다. 추락하는 학교 성적 때문에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기도 했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고요한 시간을 영위하는 것을 포기하기에는 그 맛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늦은 새벽 잠자리에 드는 나의 ‘새벽 생활’이 벌써 30년 가까운 되다 보니 이제는 아무리 피곤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새벽 서너 시 이전에는 잠을 쉽게 잘 수 없는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간혹 일찍 출근해야 하는 출장이 잡혀있거나 이른 아침 골프 약속이 있는 날에는 밤을 꼴딱 새우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도 일찍 자고 싶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 먹은 병아리마냥 새벽 세시까지 잠을 잘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다.

마흔이 훌쩍 넘으니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져 별의별 시도를 다 해보았다. 스위스의 푸른 초원에서 울타리를 넘어가는 양의 숫자를 세어보기도 했고, 스마트폰으로 갖가지 빗소리를 틀어 놓기도 했으며, 싸구려 위스키를 홀짝이기도 했고, 심지어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내 오래된 불면을 당해내지 못했다.

최근에 내가 겪고 있는 불면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별의별 근심과 걱정에 잠을 설치고 있다. 복잡한 삶의 무게에서 오는 사회적인 불면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겪고 있는 이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심과 무궁무진한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가령, 팔순을 한참 넘기신 아버지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고, 학교에서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는 아들과 딸이 친구들과 싸우지 않을까 걱정이고, 험하게 운전하는 아내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고, 정기 검사 중 내 몸 속에서 고약한 암이 발견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요즘같이 험난한 경쟁시대에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가 도태되지나 않을까 걱정이고,  내일은 또 어떤 끔찍한 뉴스가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근심과 걱정에 마음이 어지러우니 나도 모르게 신경은 곤두서고 잔소리가 늘어난다. 예전부터 내가 원했던 중년의 모습은 가벼운 입은 닫고 웃으면서 지갑을 여는 것이었는데, 나는 내 홀쭉한 지갑을 닫고 대신 필요 이상으로 입을 나불대고 있는 듯하다. 이 잔소리들은 나에게는 지속적인 불면증을, 그리고 상대방에게는 꾸준한 스트레스를 야기하니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듯하다. 나는 일그러진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음악과 문학에 열정적인 넉넉한 중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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