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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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2>
  • 한지윤
  • 승인 2016.06.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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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아방가르드족은 대체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좋아한다는 투의 스타일을 표방한다.
“그 교수, 이름이 뭐래?”
“나대수 교수라고 하던 것 같던데......어딘가 이상스런 이름이지......”
“나대수 교수라고? 알고 있지. 우리 대학에도 이번 학기부터 강사로 나오고 있는 교수지. 애들이 내가 대수요 라고도 불러 댄다구.”
“안 될 소리. 그런 식으로 교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니까 그반발로 자기 추종자도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심리에서 여학생 들에게 마구 손을 뻗치는 거야.”
나대수 교수는 <포그너>를 연구했고, 소영이 학년들에게는 <미국문학개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교수는 경성여자대학교에서는 아직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흥미로운 미국문학에 대한 인기 때문에 그 강의에 출석하는 학생수는 꽤 많았다.
소영이는 언니에게 나대수 교수에 대해 도무지 마음에 들 구멍조차 없는 시시답답한 인상이라고 욕해 댔다. 키는 멀거니 크고 말같은 인상에 칫솔질이나 하는지 의심수럽다고 했다.
어딘가 점액질인 성격이 있을 것 같고 아무래도 손 바닥은 눅눅한 땀투성이 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잡거나 이똥 투성이의 입으로 키스를 하거나 한다면......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려 온다고 소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른바 아방가르드양은 나교수의 그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인지 늘 붙어 다니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나교수라는 사나이는 여성들에게 친절을 다해 보이는 척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끈질기게 언제까지라도 치근덕스럽게 물고 늘어질 사나이다. 소영이는 그런 남자가 징글맞게 싫었다. 가장 악질적인 ‘여성의 적’ 이라고 소영이는 단호히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런 남자, 소위 사나이라고 하는 그런 존재는 지구 위에서 싹쓸어 버려야 돼, 언니!”
“소영아, 쓸데없는 짓 하지마! 네 형부가 도리어 곤란해 질지도 모르잖니......”
언니 민영이는 걱정이 되는 듯이 말했지만 소영이는 풍선처럼 명랑하게 웃어 버렸다.
언니와 그런 얘기를 주고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영이는 뜻밖에도 의외의 곳에서 나대수 교수와 마주쳤다.
차창에는 저녁의 땅 거미와 함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30분 정도면 전철은 성북역에 도착한다. 소영이는 청량리역 부근에서 감은 채로 있던 눈을 천천히 뜨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선 잠을 자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교외에 있는 친구집에 들러 놀다 돌아오는 길이므로 전철을 타고 줄곧 바깥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량리역 에서부터 나대수 교수가 나타나 비어있던 옆 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도 빨리 고약한 적과 부딪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소영이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 순간 눈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어떤 태도로 나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므로 어떤 결심이 굳혀지기까지 우선 선잠 전법으로 나온 것이다.
더욱 소영이는 자신의 잠자는 얼굴에 자신이 있었다.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자아의 완전 상실상태, 자아부재의 상황을 꿰뚫어볼 필요가 있는데 그녀는 남동생 규형이에게 부탁을 해서 언젠가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본 적이 있었다. 한참 잠들어 있는 새벽 2시쯤 자동적으로 카메라의 플래쉬가 터지며 셔터가 열리도록 장치를 했던 것이다.
자아의 완전 상실상태에 빠져 있어도 예상외로 자신이 매력적인 ‘잠든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족했었다. 하긴 이 비밀 작전의 대가로 소영이는 동생에게 비싼 현상료의 지불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지만.
소영이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눈 앞에 앉아 있는 나대수 교수를 쳐다보았다. 나대수 교수는 소영이의 단정하게 오무리고 있는 두 다리를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쓰다듬어 가듯 훑어 보고 있었다. 소영은 오늘따라 불루진 대신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소영이는 마음을 단단히 추스리고 그대로의 자세에서 눈을 확 뜨고 그를 주목했다. 이윽고 나교수의 시선이 소영이 얼굴에 와 멈추었는데 소영이가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그는 점잔을 빼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소영이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손에 든 주간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읽기가 피곤하다는 듯한 얼굴로 책장을 덮어 벼렸다. 그러자 나교수 쪽에서 물만난 물고기처럼 달라 붙어왔다.
“실례지만 성북역 도착 시간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아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소영이가 별로 탐탐치 않게 상대를 해 주자 나교수는 그녀에게서 주간 잡지를 빌려 뒤적뒤적 갈피를 넘기는 것이었다. 10여분 정도 지났을까, 빌려간 잡지가 되돌아 왔을 때 소영이는 명함 한 장이 책 갈피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교수의 직함은 없고, 단지 이름과 주소만 적혀 있는 명함이었다. 소영이는 명함을 손가락 끝으로 꼬기작거리면서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어디 가셨다가 돌아가는 길이신지?”
“과천 친구집에요.”
사나이는 비굴하게 교태를 부리는 얼굴을 하고 웃었다.
“과천은 좋은 곳이죠. 그 곳에서 경마를 즐기셨는가?”
<계속>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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