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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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9>
  • 한지윤
  • 승인 2016.07.21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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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너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걸.”
“그래?”
유일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난 아직 어느 누구하고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
충격을 받았는지 유일호가 소영이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소영이는 그것을 피했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했다. 유일호는 소영이를 뒤쫓았고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병원 앞뜰의 경사가 완만한 잔디밭을 단숨에 뛰어 소나무 숲이 있는 데까지 달렸다. 꽤 긴 거리였다. 병 후이긴 했지만 다리가 긴 유일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소영이도 숨이 찰 수밖에 없었다. 유일호는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거리며 소영이가 멈춰 선 곳까지 오자, 그는 지나치게 달렸던지 그만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쩌면 각혈이라도 하지 않게 될까 생각하면서 소영이는 유일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의 걱정과는 엉뚱하게도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유일호에게 말했다.
“어머, 더 달라지 않는 거야? 이젠 환자가 아니잖아? 뭐든 할 수 있잖아?”
유일호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소영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작별을 고하고 도망치듯이 돌아와 버린 소영이에게 며칠 후에 유일호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 소영이 네가 그렇게 돌아가 버린 후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지난겨울 이후 네가 내게 베풀어준 불가해한 친절을 회상해 보았다. 너를 잃어버린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나는 이 상처를 더 이상 어루만질 수 없어 이대로 바다를 향해 뛰어 들어가 죽어 버릴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헤엄칠 줄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앓고 난 후로는 허약한 체질로 인해 비교적 간단히 심장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 때 그대로 바다를 향해 뛰어 들었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살 것 이냐 죽을 것이냐의 가능성을 자유로이 선택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그럴듯한 생각인가. 수술을 받기 이전의 나는 무기력 그 자체였으며, 수술 후의 나는 살고 싶어도 죽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 생사의 선택권은 나 자신이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나로선 하나의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네게 뭔가 감사를 하고 싶다.
너를 원망하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감사를 하고 싶다.
나는 병을 빙자해서 내게 응석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거의 다 완쾌되어 간다. 그러나 너는 갈빗대가 모자라는 가난한 내게 있어서는 높은 산봉우리에 핀 고귀한 한 송이 꽃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기로 마음 먹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원망하는 것도 또 체념하기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 실연을 어느 새 알았는지 병원 간호사가 위로해 주러 왔었다.-
소영이는 천천히 편지 읽기를 다 끝마치자 그 책상 서랍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니까 우등생은 안심해도 된다구……”
하고 남자나 되는 듯이 호기있게 중얼거렸다. 문득 소영이의 가슴에 유일호에 대해 새로운 우정이 솟구쳤다. 그 잘 웃는 세명의 간호사들이 있다면 유일호는 그다지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체없이 소영이는 어머니의 방문 앞으로 가 큰 소리로 외쳤다.
“미장원에 다녀올 거예요. 엄마! 머리가 너무 길어 귀찮아서 안되겠어요.”

불길한 13일의 금요일
소영이는 아침부터 이것저것 제대로 되는 일 없이 말썽투성이의 연속이었으므로 불안했다. 날씨는 궂어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영이는 집을 나서려다 신발의 끈이 끊어져 문 앞에서 그만 나동그라져 현관으로 되돌아 와 다른 신발로 갈아 신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부탁한 속달 편지를 현관에다 그대로 놓아 둔 채 잊고 나와 버렸다. 역까지 와서야 비로소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되돌아가야 했다. 속달 편지를 들고 나와 우체국의 속달 창구로 뛰어 갔는데 이번에는 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눈에 보이지 않는 고약한 악마가 등허리에 달라붙어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이라고 소영이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로 강의 시간에 늦어서야 교실로 달려갔는데 노트를 꺼내고 만년필을 찾으니 뚜껑이 벗겨져 펜촉은 꼬부라져 있지를 않은가. 노트장의 바닥이 박박 긁히면서 도저히 글씨가 제대로 쓰여 지지를 않는다. 아아, 어째서 세상에는 이렇게 원하지도 않은 반갑잖은 일만이 생겨나는 것일까.
이제 기분 따위 감정은 온통 멍텅구리가 되어 버렸다. 비록 단순히 일상생활의 조그만 불평들이 겹쳐져 발생한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영이는 이러한 일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난 우울함은 인간이 역경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것처럼 숙명지워졌다는 근본적인 복잡성과 연관이 맺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 따위 재수 없는 일들과 우울한 기분은 한시라도 빨리 떨쳐 버려야만 한다. 이 따위 재수 없는 일들과 우울한 기분을 씹어 보고 나서 그 무슨 유익이 되는 것을 얻어 내려고 한다는 것은 용이하지도 않을뿐더러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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