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산 정기 서린 아름다운 단일마을 봉서리 마을
상태바
봉수산 정기 서린 아름다운 단일마을 봉서리 마을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10 1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0>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금마면 봉서리마을

금마면에서 유일한 단일 마을… 인구 많고 면적 넓어
초대면장 배출한 마을로 일제강점기에도 어려움 없어
논농사 중심… 일부 농가 대왕버섯 등 특수작물 재배
버스노선 신설·마을길 포장·휴식처 마련 등 숙원 사업

봉서리 마을 주민들이 윷놀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금마면 유일 단일 마을로 화합 잘 돼

금마면 봉서리에는 현재 111가구 221명의 마을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금마면에서는 유일한 단일마을로 인구가 많다. 또한 봉서리의 경우 마을의 면적이 매우 넓기 때문에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따라 분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봉서리 마을에는 현재 화장장과 장례식장 등이 위치한 홍성추모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봉서리 마을 주민들은 일각에서는 혐오 시설로 느낄 수 있는 시설이지만,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한 시설이기 때문에 마을에 자리 잡은 시설을 홍성군민들이 많이 이용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봉수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봉서리 마을은 물이 맑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다. 또한 어르신들을 공경하며 마을 주민 간 단합이 잘 되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봉서리에서 홍성읍이나 홍북면 내포신도시까지 차량으로 10분에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다만 아직까지도 버스가 마을 안까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의 불편함이 커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어르신들의 경우 마을 입구까지 나가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전동차를 이용하는 어르신들의 경우 주차를 할 공간이 마땅치 않고 몇몇 어르신들은 전동차도 없어 불편함이 큰 실정이다. 특히 다른 마을에 비해 규모가 크다 보니 입구까지 나가는 것도 쉽지 않고 중간 중간 휴식시설인 정자 등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것도 개선사항으로 꼽히고 있다. 또 마을 주민들을 위한 운동기구 등의 시설도 필요한 실정이다.

봉서리 마을 주민들은 숙원 사업으로 마을 안길 아스콘 포장을 손꼽았다. 상수도 공사로 마을 안길과 농로 대부분의 표면이 고르지 못해 재정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로포장이 되지 않아 노후화되는 농업 현실에 따른 대형 농기계 사용이 어렵고, 전동차를 운전하는 마을 어르신들의 사고 우려까지 제기돼 이에 대한 해결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봉서리는 마을회관과 노인회관이 분리돼 있으며, 마을회관의 경우 2층 규모로 매우 크고 훌륭하게 지어져 있다. 이는 10년 전 홍성추모공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숙원사업이었던 회관 신축이 진행되면서 지어진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회관과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화합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칠월 칠석 날이 되면 마을 안길을 닦고 노면 인근 제초작업도 함께 실시하고 있다. 봉서리 마을 주민 대부분은 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일부 귀농한 농가에서 특수작물로 대왕버섯 등을 재배하고 있다.

봉서리 마을 뒤로 보이는 봉수산과 마을전경.

◇금마면 봉서리 마을 역사와 개관

금마면 봉서리는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면에서 가장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마을이다. 봉서리는 동쪽으로 예산면, 서쪽으로 덕정리, 남쪽으로 월암리, 북쪽으로 인산리로 감싸져 있는 마을이다. 또한 다른 마을에 비해 굉장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도 많다. 봉수산 산자락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민가가 분포한 것도 특징적이다. 과거에는 산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수구막이를 조성했으나 1970년대 경지 정리로 수구막이를 없앴다고 전해지고 있다.

봉서리는 백제시대 금주군에 속했고, 신라시대에는 임성군에 속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홍주에 속했다가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 조선 말기에는 홍주군 평면 지역이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한지골, 호동, 임곡리, 천동 및 양지리의 일부를 병합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봉서리라는 마을 이름은 봉수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봉이 깃들이는 형국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봉수산은 금마면에서 정남쪽에 자리잡은 구릉봉에서 갈린 산맥의 하나로,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을 가로막는 산이자 홍성군의 안산으로 일명 대흥산이라고도 한다. 봉수산의 산정부는 완만한 철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483.9m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서해안 지역에서 보면 상대고도는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산 속에는 계곡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봉수산은 산세가 매우 험준한 편으로, 백제시대 임존성이 만들어졌고 현재도 임존산성이 존재하고 있다. 봉수산의 북쪽 산륵에는 비티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는데 홍성과 대흥을 잇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봉수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상을 이룬 덕택에 봉서리는 마을 이름과도 같이 봉이 깃들어있는 형상과 같이 고즈넉한 모습을 보인다.

봉서리 마을에서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성씨는 청주한씨다. 상골에 청주한씨 입향조 묘가 자리잡고 있으나,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청주 한씨는 거의 없다. 현재 봉서리에서 가장 많은 세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 성씨는 신창 표씨다. 신창 표씨의 10대조인 표기방씨가 낙향해 떠돌다가 먹고 살기 좋다고 판단된 봉서리마을에 입촌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많은 표씨들이 마을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신창 표씨 다음으로 많이 사는 성씨는 경주 최씨로 600여 년 전 봉서리마을에 입촌해 현재 월암리에 선산이 있다.

◇초대면장 배출·일제강점기 잘 넘겨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징용을 당하지 않은 젊은이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봉서리 주민들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시절에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또한 강제 징용을 당해 고생을 한 분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봉서리출신 초대면장과 2대 면장 덕분이었다. 초대면장을 지낸 박병모씨는 원래 공주 사람이었으나, 봉서리 주민이었던 최씨라는 사람이 그를 봉서리로 오라고 해 결국 초대면장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초대면장은 봉서리마을 전체의 가장 큰 부자였으면서도 본인의 권력을 이용해 주민들이 징용 당하지 않게 힘을 썼기 때문에 봉서리 주민들은 금마면에서 유일하게 일제강점기에 고생하지 않은 마을로 일대에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초대면장의 뒤를 이은 2대 면장에도 공교롭게 봉서리 출신 김재연 씨가 당선되면서 다른 마을에 비해 봉서리 주민들이 큰 어려움없이 일제강점기를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봉서리 마을회관.

◇기묘년 가뭄과 봉서저수지

홍성에서 매우 끔찍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기묘년 가뭄은 봉서리 주민들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봉서리 가뭄의 피해는 다른 마을에 비해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완성된 봉서저수지 덕분에 기묘년 가뭄에도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봉서리는 봉서저수지 덕분에 안정되게 매년 꾸준한 수확량을 산출했고, 덕분에 다른 마을에 비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봉서저수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공사가 시작돼 축조됐고, 이후 한국전쟁 때문에 공사가 한 차례 중단됐으나 밀가루 보급을 받으면서 공사가 재개됐다. 이러한 이유로 주민들은 봉서저수지 공사를 ‘밀가루 공사’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에 한 포대도 채 지급되지 못한 영세민을 상대로 진행된 저수지 공사는 결국 지속되지 못해 정부에서 주관해 지금의 저수지가 완성됐다고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