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공경하며 한 마음으로 단합하는 상송1리
상태바
어르신 공경하며 한 마음으로 단합하는 상송1리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1 17: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8>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장곡면 상송1리 두리마을

겨울철 홀로 식사하는 독거어르신 위한 공동급식
마음열고 다함께 화합해 나가는 귀농인과 원주민
벼농사 많아… 일부 다문화가정 베트남채소 재배
주1회 한글·노래교실 큰 호응… 주민전체 여행도

상송1구 어르신들이 한글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주1회 진행되는 한글·노래교실
장곡면 상송1리 두리마을 경로당은 한글을 배우는 어르신들로 북적였다.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금요일마다 한글 교실이 열리고 있다. 상송1리 마을은 이러한 한글교실 외에도 일주일에 한 번 노래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1일이면 상송1리 마을회관에서는 매일 점심마다 공동급식을 실시해오고 있다. 면이나 군의 별다른 지원이 없음에도 마을 기금을 활용하고 부녀회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공동급식을 실시해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상송1리 두리마을은 혼자 거주하는 독거 어르신이 많아 끼니를 챙기기 어렵고 홀로 식사를 하며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동급식에 임하고 있다. 마을기금은 주민들의 협조뿐만 아니라, 멀리 외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까지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찬조해 넉넉하게 꾸려지고 있다.

상송1구 두리마을회관 전경.

◇어르신 공경하는 희망마을 만들기
상송1리 두리마을은 마을 총무이자 청년회장인 최익 씨가 회장을 맡아 희망마을 만들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식용국화를 이용해 노동력은 감소시키면서도 소일거리를 할 수 있는 소득사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올해에도 두 번이나 있었던 독거노인의 고독사 등을 방지하기 위해 부녀회가 앞장서 반찬나누미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또 마을 내에 거주하고 있는 두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특별히 다목적 회관에 공부방을 마련해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준비 중이며, 평생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프로젝터 빔을 설치해 어르신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화 관람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해나고 있다. 이밖에도 1년에 한 차례씩 마을 어르신들을 노인회 주관으로 여행을 떠나며, 내년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떠나는 여행을 준비중이기도 하다. 또 정월대보름 행사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귀농인·원주민 화합 잘 되는 두리마을
상송1리 두리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원주민과 귀농인이 한 마음으로 어우러지고 주민 모두의 화합과 단합, 결속이 잘 된다는 점이다. 곽현정 부녀회장과 최익 총무 등 마을 운영위원 가운데에도 귀농인이 소속돼 있고, 현재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가정도 다수 존재한다. 이선군 이장은 원주민과 귀농인이 화합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마음을 열고 진실하게 대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귀농인들 역시 마을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어려운 일에도 솔선수범하는 등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기 때문에 보다 한 마음으로 화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원주민들 역시 귀농인 등 이주민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농사일을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는 등 도움을 주고 있어 상호 협력하며 발전하는 마을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두리마을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벼농사가 주된 소득원이고 과거에는 약초를 경작했다고 한다. 경작했던 약초는 황기, 황금 작약, 오미자 등이었으며 마을 소득의 일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현재는 마을 내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정에서 4중 하우스를 이용해 베트남 채소를 재배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다문화 농가에서 재배해 총 20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베트남 채소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안산 등지로 팔려나가고 있으며 매번 물량이 부족할 만큼 외국인들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상송1구 두리마을 전경.

◇두리마을 개관 및 역사
장곡면 상송1리는 면소재지인 도산리에서 청양군 방면으로 96번 지방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동쪽으로 옥계리, 서쪽으로 신풍리, 남쪽으로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북쪽으로는 상송2리 및 대현리와 인접해 있다.
백제 때 사시량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결성군의 영현인 신량현, 고려 초엽에는 여향현에 속했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주군에 속했고, 말기에 홍주군 성지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오리, 중두리, 하두리와 상두리, 분토동의 각 일부를 병합해 상오와 반송의 이름을 따 상송리라 해 홍성군 장곡면에 편입됐다. 현재 상송1리는 두리 마을로 불리고 있는데, 마을 뒤에 위치한 두리상봉과 앵두봉 아래 마을이 자리해 전형적인 산하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송1리 두리마을의 대표적 성씨는 전주 이씨, 남양 홍씨, 인동 장씨 등이며, 전주 이씨와 남양 홍씨는 10대, 인동 장씨는 8대를 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 전주 이씨 선대는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충남 보령으로 낙향했으며,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이씨의 10대조 되는 이득실이 이곳 두리마을로 입촌했다고 한다. 또 현재는 없지만, 마을에 오래 전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동래 정씨가 있다. 마을에 좋은 집터로 예전에 사라진 기와집터가 있는데, 동래 정씨가 거주했던 집터일지도 모른다고 추정되고 있다.

◇3·1운동과 한국전쟁, 샘제와 대동계
상송1리 두리마을 주민들은 3·1운동 당시 마을 뒷산인 매봉재 등에서 봉화를 놓고 만세시위를 했다고 한다. 도시 또는 장터 등에서 대규모 시위대가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과 달리 농촌에서 적은 인원이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야간에 만세시위를 전개한 전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또 두리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 내 좌익성향의 인물이 없어 큰 피해가 없었고, 죽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마을주민 가운데 어떤 사람이 북한 패잔병을 잡으러 쫓아갔다가 북한군이 수류탄으로 스스로 자살을 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1970년대 초 훈장을 수여받고 공훈 결과로 예비군 중대장 직을 수행한 인물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도 상송1리 두리마을 주민들은 과거 마을의 공동우물에서 샘제를 지냈다고 한다. 샘제는 정월 보름 상두마을과 중두마을에서 지냈는데, 샘제를 지내기 전 물을 푸고 주변의 이끼를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샘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이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두리마을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계가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 조상대부터 이어 온 대동계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운영됐으며, 조직은 계장 1명, 총무 1명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고 상부상조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대동계에서는 새 짚을 엮어 상여집 지붕을 새로 하곤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