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사람이 살던 나라 잃은 슬픔이 서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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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사람이 살던 나라 잃은 슬픔이 서린 곳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2.0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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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마을을 읽다<2> 홍북면 석택리 석교·택리마을
망국재를 관통하고 있는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주진입도로 홍북터널. 터널 위로 석교와 택리의 경계선이 지나며 석택리의 환호취락 유적이 발견됐다.

석교마을 입향, 한산이씨, 경주최씨 11대째 밀양박씨 등 거주
택리마을 입향, 경주김씨, 청주한씨, 나주임씨, 김해김씨 등 순
동학농민군 활약 김상현·김상림, 홍주성으로 끌려가 죽임 당해

 

홍북 석택리는 석교(돌다리)와 택리(직절)마을이라는 지명이 근원을 이루는 곳이다. 석택리의 으뜸인 ‘석교(돌다리)마을’은 큰말이나 작은말에서 서낭댕이로 갈 때 건너던 돌다리가 있었다고해서 ‘돌다리마을’로 불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돌다리에 세거하는 대표적 성씨로는 ‘한산이씨’가 있다. 입향조로 알려진 이덕영(李德塋)이 1600년대 천안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석교마을의 한산이씨는 인제공파(麟薺公派)의 지파인 광목공파(光牧公派)의 자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덕영은 이담(李潭)의 아들로 밀양박씨와 혼인하였고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묘소는 석교에 있다. 그의 아들 이학연은 파평윤씨 윤기택의 딸과 혼인하였고 사마시에 급제한 후 교관을 지냈으며, 묘소는 아들 이맹직과 함께 천안에 있다. 다만 이맹직의 처 밀양박씨 박세채의 딸의 묘소는 석교마을에 있다. 이렇듯 부인 밀양박씨의 묘만 석교에 둔 것으로 봐 한산이씨 입향 이전에는 석교마을에 밀양박씨가 터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석교(돌다리)마을에는 한산이씨와 함께 경주최씨가 11대째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밀양박씨, 의령남씨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직절마을, 꿩이 알을 품은 형국
또한 택리(직절)마을은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터라는 뜻으로 ‘복지포란형(伏雉袍卵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직절은 한자어로 ‘치사(稚寺)’이니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절터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당시 절이 있을 때에는 ‘벌말’이었다고 전해진다. 직절마을은 절이 없어지자 벌말사람들은 절이 있던 곳으로 이주해 살면서 ‘직절’이란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과거 절이 있었던 마을 이어서인지 지금도 소당산 동쪽 산허리에는 ‘정심사’라는 절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 ‘치사면(稚寺面)’이었다는 것을 보면 ‘꿩’의 형국에 대한 인식의 역사가 깊은 곳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꿩 또는 닭의 형국의 땅에는 반드시 매나 개가 있어야 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직절마을의 길 건너 서쪽에는 매봉재가 있다. 또한 ‘돌모로’라는 곳은 꿩을 몰아 들어왔다는 뜻이라 하며, 야해뜰과 허간뜰은 꿩이 새끼를 친 자리라고 보고 있다. ‘허간뜰’은 ‘하관들’ 또는 ‘허관들’이라고도 하는데 물이 하얗게 차오른 ‘허연들’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직절마을은 복지포란형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특징은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은 흥하고 나가는 사람은 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북동쪽은 예산과 경계를 이루며, 넓은 삽교평야에 마치 길쭉한 곶처럼 나지막하게 뻗어 나온 산줄기에 소당산과 안산이이라는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고 형성됐다.

직절마을은 한 성씨의 동족마을은 아니지만 입향 후 1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집안이 많다. 직절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경주김씨, 청주한씨, 나주임씨, 김해김씨, 평산신씨, 해주최씨, 밀양박씨 순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은 ‘맹씨’였다고 한다. 맹씨는 자손이 없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후손이었던 맹 노인이 논 1000여 평을 마을에 희사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주민들은 맹 노인을 ‘동네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매년 9월 27일이 되면 이장이 주도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9월이 바쁜 농번기였으므로 음력 3월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다, 다시 2월 그믐날로 정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직절마을에는 경주김씨가 200여 년 전에 입행해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예산 음봉면 계정리에 선대의 묘가 있었는데 몇 해 전에 직절의 종산묘역으로 옮겼으며, 7째 때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청주한씨는 정읍참봉이었던 선대가 서산에서 직절마을로 이주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승운이라는 사람은 힘이 장사여서 2미터 높이를 거뜬히 뛰어 넘었는데 5되들이 병위에 부엌칼을 꽂아 놓고 책상다리로 앉은 채 뛰어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해 마지막 후손이 예산 삽교의 목리로 이사를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직절마을에 청주한씨는 3가구가 살고 있다.

직절마을에는 19세기 후반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항거한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김상현(金商鉉)과 김상림(金商林)이 각각 갑오년 11월 4일과 19일에 출가(出家)하여 돌아오지 않음에 따라 그날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결국 이들 동학군 부자는 관군에게 잡혀 홍주성(洪州城)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직절마을에는 동계가 있었는데, 그 연원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동네주민 전체가 하나가 되는 동계는 1936년에 이르러 ‘택리진흥회(宅里振興會)’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택리(직절)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계원이 되며 회장과 부회장 각각 한명씩을 선출하고 약간 명의 총무부장으로 구성돼 있다. 택리를 떠나게 되면 자연히 탈퇴하게 되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동네에 인사를 다니며 진흥회 가입을 축하받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규약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앞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공려조합(共勵組合)의 문서는 초대부터 3대까지의 활동상이 자세히 나타나 전해져 오고 있는데 196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형태의 사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에 조합장이 선정돼 마을마다 분뇨탱크를 만들고 담장을 쌓는 등의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1945년의 ‘식산계대장(殖産契臺帳)’은 비료를 반별로 배정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구매품매팔장(購買品賣捌帳)’이라 각 반의 반장이 책임자였고 ‘식산계주사(殖産契主事)’가 관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레 관련 문서에는 마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택리마을의 마지막 두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문서다.

망국재에서 바라본 석교(돌다리)마을. 사진 왼쪽에 한산이씨 묘역이 보인다.

■망국재, 터널로 건설 ‘환호취락’보존
택리(직절)마을은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암탉골이라고 불리는 음달말과 부엌뜸, 세매집이라 불리는 마을의 명칭으로 볼 때도 동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음달말인 암탉골은 마을에서 안쪽으로 깊은 골에 위치하는데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으로 닭의 알주머니처럼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세집매는 ’황새암‘이라고도 하는데 세집만 살았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음달말인 암탉골을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줄기에 ‘망국재’가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망국재’는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도청의 주진입도로가 개설되면서 절개되었다. 다만 환호취락 구역은 터널(홍북터널)로 도로를 개설해 문화재보존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다시 말해 ‘망국재’는 택리(직절)과 석교(돌다리)마을의 경계로 나지막한 고갯길이다. 이 고개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산꼭대기에 올라가 ‘망곡(望哭)’하였으므로 ‘망곡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 산자락은 평평하게 다져진 모양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봉화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홍북 대인리에서 전해지기를 바로 보이는 ‘망국재’ 산꼭대기에서 불을 피우며 서로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봉화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추정되고 있다. 또한 ‘망국재’ 산등성이의 큰 말샘에는 보통 남자어른의 키보다도 더 큰 ‘미륵’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바로 이곳에서 도청주진입도로 개설시 환호유적이 발견된 곳이어서 이런 가능성에 대한 추론이 충분히 예견되는 곳이다. 이곳 ‘망국재’ 일대에 대해 문화재전문가들은 ‘마한 54개 소국 중 ‘목지국’과 ‘감해비리국’의 수도였거나 집단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망국재 인근의 ‘백절’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절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실제로 옛날 기왓장이 많이 나왔다는 증언도 있기 때문에 ‘감해비리국’의 수도였다는 추론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망국재’ 아래로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정원대보름에 서낭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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