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의 외가가 있었던 역사적인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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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의 외가가 있었던 역사적인 고장
  • 취재=허성수/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2.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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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29> 홍북읍 갈산리 원갈산마을

광천읍 광천리 신대마을은 오래전 옛날 방랑시인 김삿갓의 외할아버지 이유수가 살았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2010년 발행된 광천읍지에 따르면, 마을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가 소개돼 있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이유수의 99칸집 보존하지 못해
이유수는 함평 이 씨 족보에서 사위가 김안근으로 확인된다. 김안근의 아들은 김병연으로 바로 김삿갓의 본명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김삿갓의 외할아버지가 이유수가 맞다고 확신한다. 함평 이 씨 족보와 주민들의 전언을 토대로 하면, 김삿갓의 외할머니는 원주 변 씨이다. 즉, 홍경래의 난으로 김삿갓의 할아버지는 역적이 되고, 김삿갓의 외조부는 공신이 됐다고 한다. 그 후 이유수는 낙향하여 신대마을에 들어왔고, ‘ㅁ’자 형태의 99칸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이 집이 1980년대에 개인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현재 마을회관 옆에 있었던 이유수의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신천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때 보존했다면 고증을 거쳐 문화재로 지정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마을사람들로서는 못내 아쉽다.

이유수의 부인 변 씨는 열녀로 알려졌는데, 신대마을에 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녀문이 세워져 있다. 김삿갓의 외할머니이기도 한 변 씨는 단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었으나 최근 함평 이 씨 문중에서 족보를 통해 근거를 확보했다고 한다. 열녀문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문에 소개돼 있다. 원주 변 씨는 길주 목사 변성화의 맏딸로, 전라좌수사 이유수(1769~1821)와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자녀 중 큰딸은 안동 김안근과 결혼해 병하·병연 형제를 두었으니, 원주 변 씨는 김병연, 즉 김삿갓의 외조모가 된다.

원주 변 씨는 1787년(정조11년) 여름에 길주목사로 근무하던 부친 성화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게 하여 생명을 3일간 연장시켰다. 부친이 사망하자 변 씨는 3년 상을 지낼 장성한 아들이 없어 맏딸로서 시댁의 허락을 받아 묘 앞에 여막(초가)을 짓고 3년 상을 지냈다.

1811년(순조11) 겨울에 남편 이유수를 따라 숙천(평안남도) 임지에 있을 때, 홍경래의 봉기로 주변 여러 고을이 함락됐으나, 상경 중인 남편을 대신해 관군을 이끌며 큰 공을 세웠다 한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남편 이유수가 신병의 악화로 고향에 돌아오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피와 살을 고아서 먹이는 등의 지극한 간호를 했으나 끝내 운명했다. 이에 변 씨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비상(砒霜)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사망했고, 부부의 장례를 함께 거행했다고 한다.

이런 변 씨의 정절을 지킨 열행은 널리 알려져 사망한 다음해인 1822년(순조22)에 열녀로 지정됐다. 열녀로 인정된 현판은 정려각 내부에 걸려 있다. 묘소는 홍성군 장곡면 행정리 산21-1번지(점골)에 있다.
 
■매년 정월 보름 산신제 지내
신대마을 사람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무형의 문화유산인 산신제만큼은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신동산에 산제당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 경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 때는 용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산제당에 걸어놓는다. 용기, 혹은 용대기라고도 하는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일제 강점기에 분실됐다. 1946년 정부 수립기념으로 열렸던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우승하면서 상품으로 받은 용대기를 사용하게 됐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낡고 닳아 못 쓰게 됐다. 그 후 2000년경 마을주민 중 유승학 씨가 새롭게 그림을 그려 제작한 용대기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6·25전쟁 후 마을운영 관련 문서 보존
지난달 20일 신대마을회관에서 만난 정헌국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최정권 씨는 용대기를 비롯해 오랫동안 간직해온 문서들을 보여줬다. 고문서는 없었지만 6·25전쟁 후 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작성한 문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마을에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내용을 기록한 장부 성격의 문서였다. 사람 이름과 함께 금액을 적고 상(上)·하(下)로 표시하기도 했는데 상은 꿔준 것, 하는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6·25전쟁 직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을에서 공동기금을 마련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마을 운영자금으로 쓰면서 신동산에 4000평의 땅을 마련해 공동경작을 하기도 했죠.”

최정권 씨의 말이다. 또 1958년 마을에서 산제를 지낼 때의 축문도 잘 보존돼 있었다. 입대한 젊은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서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할 수 있도록 빌었고, 마을의 안녕과 단합과 발전을 위한 내용도 빠트리지 않았다.

거의 20년이 된 용대기도 비교적 잘 보관한 것 같은데 만지면 천이 망가질 것처럼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여러 겹 접어서 보관하다 보니 넓게 펼쳐놓아도 구겨진 부분이 쉽게 상할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대형 액자를 제작해 표구처럼 걸어놓은 상태로 보관하거나 전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최정권 씨는 김삿갓 외가에 대한 역사자료를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고증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뼈아픈지 6·25전쟁 후의 기록만큼은 잘 보관해서 후손들에게 마을의 역사자료로 길이 남기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신대마을도 바로 광천천 다리 하나 건너 광천읍 도심이고 장터여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체 180가구 중 농업인구 비율은 20% 정도다. 아파트와 빌라가 있어서 직장에 다니거나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 외지에서 온 젊은이가 많은 편이다. 다행히 마을 발전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청년회에 25명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중상위급이다.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 등 모든 단체들이 새마을지도자협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경로효친 사상도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30여 명으로 구성된 노인회는 이광용 회장을 중심으로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신대마을 사람들
대장간 계속 보존돼야 하는데
정헌국 이장

“우리 마을에 대장간을 배선돈 어르신이 혼자 운영하고 있습니다. 계속 보존되길 바라지만 그것을 물려받아 운영할 후계자가 없습니다.”

신대마을 정헌국 이장은 젊은이 가운데 대장간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또 노인회 운영비가 부족하다며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여 말했다.
정 이장은 40년 전 신대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다. 지금은 벼농사를 짓고 있다.

농기계박물관 지으면 좋겠어요
 

최정권 새마을지도자
최정권 새마을지도자는 신대마을에서 태어나 61년간 살아온 토박이로 마을 역사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의 쟁기와 써레를 비롯해 전통 농기구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로 상당한 양을 모았다. 그러나 보관할 데가 없어 옛 농기구 창고가 있는 상담마을에 여러 트럭분을 기증했다고 한다. 탈곡기, 저울 등 일부 남은 농기계는 자택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다.

“농기계박물관을 짓는다면 기증할 생각입니다. 시골을 다니면서 수집했는데 보관할 데가 없어요. 후손들에게 잘 보관해서 넘겨주고 싶습니다. 오서산 등산객들이 오면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농기구박물관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최 씨는 농협에 20년간 근무하고 은퇴한 후 지금은 담산농기계·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마을이 도시화되면서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토속신앙과 옛 조상들의 모습까지 잘 보전해 전하고 싶습니다.”

최정권 씨가 1946년 정부수립 기념으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여해 받은 우수상 기념 휘호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가업 이어받아 대장간 운영
 

배선돈 어르신.

신대마을회관 부근에는 전통 방식으로 농기구를 제작하는 대장간이 있다. 마을 지도자들의 안내로 찾아가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허름한 창고 같은 작은 건물 안에 칠순 노인이 풀무불에 쇳조각을 달구며 한창 작업 중이었다. 바깥 큰길 방향으로는 간판도 없었고, 낡은 나무판자 벽으로 가려져 있어서 외지인에게는 대장간으로서의 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옛날 방식으로 불에 달궈서 연마한 농기계가 좋아서 즐겨 찾는 단골 농업인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온다고 한다.

간판도 문패도 없는 이 대장간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며 옛날 방식 그대로 농기계를 제작하고 있어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었다. 배선돈(75) 어르신이 대장간을 운영하는데 아버지가 하던 가업을 이어받았다.

최정권 씨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그 대장간을 보고 자랐다며 아마 70~80년 이상 역사를 이어온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것도 자리를 한 번도 옮긴 적 없이 오직 그 자리만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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