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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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5>
  • 한지윤
  • 승인 2017.12.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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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내진실 안에서 나이분 간호사의 음성이 들여오고 있었다.
“아침 식사 하지 않고 오셨죠?”
“네.”
“물도 마시지 않으셨죠?”
“마시지 않았어요.”

수술 받을 여자의 목소리는 맥이 없었다. 초진이라고 한 차트의 기록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고 한다면 처음 당하는 중절 수술인 만큼 잔뜩 겁먹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 같은 것을 마시면 마취시켰을 때 토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토하는 것이 기관지로 들어가거나 하면 위험하거든요. 수술시에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마음 푹 놓으세요.”  

나간호사가 확인하고 있는 까닭은, 환자에게 물어 보면 ‘먹지 않았다’, ‘마시지도 않았다’, 고 하면서 실은 수술 받을 때에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식사나 우유, 쥬스를 먹고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음악이 ‘소녀의 기도’를 은은히 흘리고 있었다. 초음파를 이용한 수술기구의 소독기가 현재 작동 중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음악이었다.
한박사는 차트에 기록된 문주희라는 여자의 주소를 들여다보았다. 소래로 되어 있었다.

항구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 곳은 바다에서 가까운 고급 주택지로 지금은 많은 발전을 한 곳이다. 주소·이름·나이 등 기록 사항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으나 소래에도 산부인과 병원이 있는데 굳이 이 곳의 한적한 병원까지 찾아 온 것이 분명하다.

유산을 해달라고 병원을 찾아오는 미혼의 여성들은 대개 한박사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간혹 길에서 마주쳐도 얼굴 생김새나 목소리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첫째는 한박사가 의식적으로 그녀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원인이 될 것이다.
그녀들은 모두 한박사한테 유산수술을 받으러 올 때는 목소리도 기가 죽어 있고 말수도 적은 편이다. 게다가 일부러 화장이나 복장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허술하게 하고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개 병원이란 곳에 오는 환자들은 크거나 작거나 몸에 이상이 있어서 오는 것이 상례다. 생기가 팔팔하거나 화려한 옷들로 치장을 하고 올 리가 없다. 환자들은 현재 앓고 있는 자신의 병을 어떻게든 치료를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런 심정으로 오는 것이다. 병이 완치되면 지금보다 훨씬 몸이 건강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임신중절 수술은 그렇지가 못하다. 현재 그녀들은 병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볼 때 원하지 않은 상처를 받을 결과가 되기는 한다. 이런 것에 대한 본능적인 의식이 그녀들에게 침울한 표정을 만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박사는 이런 여자들이 과거에 어떤 남성들과 어떠한 성관계를 맺었는가에 대해서 실은 관심이 없었다. 산부인과의 진찰실에 한박사가 있는 한 성행위 따위는 단지 하나의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한박사의 관심의 대상은 그 병 증상 자체뿐인 것이다.

한박사가 손을 소독하기 위해 세면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나이분 간호사는 환자에게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입술연지, 지웠어요?”
“네.”
입술의 연지를 지워야 하는 까닭은 수술 중 신체의 변화가 입술에 민감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처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계나 반지는 모두 풀어 주세요.”
“‥‥‥?”
“콘텍트 렌즈나 입에 틀니 같은 건 없죠?”
“없어요.”
“껌 같은 거 씹고 있지 않으시죠?”
“껌요?”
“언젠가 껌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않고 수술한 환자가 있어서 수술 중 큰 일 날 뻔한 적이 있어서요.”
“그런 여자도 있었어요?”
껌 얘기로 딱딱하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았다. <계속>

<이 연재소설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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