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이재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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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이재준 박사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2.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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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박사

장곡산성은 백제부흥운동을 했던 ‘주류성’이었어요

장곡면 상송리 출신 이재준 박사는 어릴 때부터 산성을 보고 자라며 백제의 종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육사 거쳐 야전지휘관이 된 후 보령·서천·청양·부여서 근무
장곡면 대현리 일대 장곡산성 꼼꼼하게 연구하는 기회 삼아
가설로 취급되던 백제 최후 격전지 신빙성 있는 근거 제시
‘백제 멸망과 부흥전쟁사’ 저서 펴내 기존 학설 뒤집어 엎어


서기 660년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자 백제의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 거점이 된 곳이 주류성과 임존성이었다. 그런데 당시 주류성은 특정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백제의 여러 군사요충지를 일컫는 지명으로 쓰였다. 홍성의 장곡산성도 그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백제부흥군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주류성의 위치가 전북 부안 우금산성, 충남 서천, 부여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목소리를 낼 뿐 홍성 장곡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런 학계를 향해 이재준 박사가 최근 홍성이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졌던 마지막 주류성이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올해 백제사 연구로 영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을 정리해 지난 여름 ‘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경인문화사)를 펴냈다. 바로 이 책에서 그는 치밀한 논증과 군사학적 접근을 통해 장곡산성 일대가 주류성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일반 사학계에서 주류성으로 언급되고 있는 지역들에 대해서도 그는 군사학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지적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백제의 혼이 담긴 유적 보고 성장
지난 18일 정오 홍성을 방문한 이재준 박사를 홍주읍성 역사관에서 만났다. 이 박사는 장곡면 상송리가 고향으로 주말을 맞아 돌아와서 쉬고 있던 중 인터뷰에 응했다.

바로 장곡산성이 있는 고장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백제의 혼이 담긴 유적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레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육사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된 후에도 주류성은 그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보령과 서천·청양·부여지역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장곡면 대현리 일대의 장곡산성을 군사·작전 차원에서 백제부흥군의 전략을 더욱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2014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공부에 집중해 늦깎이 박사가 됐다.

“백제의 마지막 왕성이 어디일까? 문헌적으로 열심히 찾아봤으나 홍성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본질은 전쟁입니다. 전쟁의 본질을 뒤집어보면 홍성이 맞습니다.”

이 박사는 군대를 모르거나 군대를 안간 학자들은 백제부흥사를 왜곡해 잘못 전한 게 너무 많다며 그래서 자신의 군 경험을 접목해 주류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학자들의 잘못된 논리를 논증하기 위해서 책이 좀 두꺼워졌습니다. 지금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군부대와 학교에 특강을 다닙니다.”

그는 아예 마주앉으면서부터 노트북을 꺼내 화면에 자신이 작성한 ppt 자료를 띄워서 넘겨가며 백제부흥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아니라 기자를 상대로 하는 일방적인 특강이었다. 그래도 수천 명을 상대로 하는 듯한 열정을 발휘했다. 그 자리에는 수강생이 한 명 더 있었다.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안병주 회장으로 그는 지난 7월 이 박사의 책을 처음 접하고 무릎을 치며 흥분했다고 한다. 그 동안 학계에서 장곡산성이 백제 최후의 격전지라는 것이 가설로만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안병주 회장은 늘 안타까워하던 터에 이 박사의 책은 신빙성있는 근거를 제시하며 기존의 학설을 뒤집어엎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곧장 연락했고 지난 추석에 처음 만나 상견례를 했다고 한다. 사실 이번 인터뷰도 안병주 회장이 기자에게 연락처를 제공하며 주선했다. 홍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매년 음력 9월 7일 장곡산성에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하다가 스러져간 순의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저서 ‘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애국심 이어받아
기자는 말을 자르면서 이 박사에게 잠깐 물어봤다. 장곡산성에 대해 열정을 바쳐 연구하는 이유가 뭐냐고….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시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애국심을 이어받아 군인이 됐습니다. 또 저의 고조 할아버지의 묘가 주류성 좌향에 있습니다. 은퇴 후 고향을 위해 기여하고자 주류성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이 박사는 기존 사학계가 식민사학을 답사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충청도 학계조차도 장곡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류성의 위치를 부안이라고 지지하는 전라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경상도는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대구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고 한다. 오랜 옛날 조상들을 무척 괴롭혔던 원수의 땅 신라에서 백제의 종말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했다.

혹시 그의 고향이 홍성이니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원리로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든 것은 아닐까? 사실 자신도 그런 오해를 살까봐 홍성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객관적인 논증과 당시 군사·작전 등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정리한 논문으로 주류성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겠다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백제 멸망과 부흥전쟁의 역사는 수많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쟁사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전해지는 사료가 주로 승전국인 당나라와 신라의 사료밖에 없고 지명 자체도 수차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130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형도 많이 변화됐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연구방법으로 문헌사학·역사지리학·음운학·미술사학·고고학적 방법 등 다양하게 시도됐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본질 자체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점이 간과됐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전쟁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전장상황을 고려한 병력 운영을 연구해본 군인의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군 경험을 살려 오랜 시간 이 연구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가 군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적절히 활용해 고대 군대의 1일 행군거리, 고대 선박의 항해 속도, 고대 병력의 식량 소요량. 고대 전략이나 전술 등이 현대전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당시의 상황을 나름대로 고증해서 적용하는 기법으로 기존 학계에서 비정한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허점을 밝혀냈다.

고대 군대는 하루 30리를 행군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오늘날 군대 개념으로 12.7km는 너무 짧은 거리다. 그러나 고대에는 많은 수의 병력이 우마차가 끄는 치중대와 함께 주로 주간에만 행군해야 했기 때문에 이 박사는 30리 행군거리가 타당하다고 지지한다.

고대 선박은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을 참고해 시간당 평균 6.29km의 속도로 항해했다는 연구 결과를 적용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660년 7월 9일 웅진구(강구)로 상륙했다고 합니다. 당시 부여 가까운 바닷가로 학계에서는 군산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군대가 하루 갈 수 있는 거리가 12km였으니 군산이 아닙니다.”

이 박사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치기 위한 소정방의 군대가 상륙한 바닷가가 보령시 대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서 주류성인 홍성까지 거리가 12km인 점에 주목했다. 1800년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주류성이 홍성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주류성의 한자를 뜻풀이해도 홍성이 답이라는 것이 이 박사의 주장이다.

즉, 주류(周留)성의 ‘주’는 두루 주(周)자로 많다는 뜻이다. 이 박사는 장곡에 여러 성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또한 문헌에는 ‘제성’(諸城)이라는 말도 사용하는데 여러 성을 뜻하는 말로 장곡에는 주류성과 여러 개의 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곡면에는 석성·학성·태봉산성·천태산성·소구니산성 등이 1.5km 내외에 있습니다. 특히 장곡면 산성리 일대는 적을 방어하기 쉽고 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야철지가 6개소나 있고 연이어 축성된 것도 이 지역이 전략상 유리한 지형적 조건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구당서 등에 나오는 제성(諸城)이 항복했다는 내용과 부합되는 곳은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대현리 일대 산성들입니다.”

이 박사는 비록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역사상 최초로 민·군 조국회복전쟁이었다는 점과 승려 도침이 주도함으로써 호국불교의 효시가 됐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 백제인의 기상과 저력을 보여준 전쟁으로서 660년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 패전 후 663년 11월까지 무려 3년간이나 주류성에서 저항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주변 강대국 안보위협 철저히 대비해야
백제부흥운동이 오늘날 주는 교훈으로 이 박사는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며 이에 대한 대비태세를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문 대통령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드 추가 배치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타협한 것은 잘했다고 평가하면서 우리의 국방력은 자주적으로 길러서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 적극 대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박사는 현재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 연구와 안보강연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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