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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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20>
  • 한지윤
  • 승인 2018.04.0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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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오늘 서울로 돌아가십니까?”
한 박사는 항상 첫 번째의 검사는 가능한 빨리 끝내기로 하고 있었다. 불임증 환자들은 처음은, 누구나 성적인 요소를 타인 앞에 털어 놓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사를 실시해 가는 동안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마치 목공예나 봉제와 꼭 같은 일상적인 순서를 밟는 것이라는 사실을 환자들이 느끼게 되고 나서부터는 한 박사와 격의 없는 대화를 예사로 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의 변화를 한 박사는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과 이천 두 곳에서 번갈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서툴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아내는 이웃 사람들과 도예를 같이 즐기고 있지요.”
“좋은데요. 난 낚시를 좀 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낚싯대를 메고 나서는 것 뿐 이었지만.”
“요트는 즐기지 않으십니까?”
“하지 않습니다. 약속해도 갈 수가 없죠. 첫째 배 위에서는 급한 산모연락을 받아도 병원으로 곧바로 돌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한 번 저희 집에 놀러 와 주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희망을 갖게 됩니다.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선생님의 이름자 한자를 얻어서 이름을 짓도록 해야겠습니다. 안 그래, 여보?”
“정말, 그래요.”

양씨 부부가 돌아간 뒤, 점심 휴식 시간에 한 박사는 박연옥 여사에게 오늘 찾아온 두 사람을 진찰했다는 전화를 걸었다.
박 여사는 전에 없이 말투가 다소 달라져 있었다. 존칭도 낮춤도 아닌 어중간한 어투였다.
“고마워요. 양씨 부인에게서도 한 시간 전쯤 전화가 왔었지. 진찰 받은 테스트는 결과가 좋았다고 기뻐하고 있더군. 한 박사는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 그 부부에게 희망적인 보증을 한 일은 없는데‥‥ ”
“아무렴, 좋아요. 음‥‥‥ 양씨 부인 이서영 씨 말이야. 정직하고 솔직한 분이지. 언젠가 어린애가 없어서 병원의 신생아실에서 갓난아이를 훔쳐 간 여자가 경찰에 잡혔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참 안 됐다고 우리 집에 전화를 해올 정도였지.”
“그래요?”

“그 마음 이해돼요? 양씨 부인은 그 범인을 동정해서 말이야, 들키지 않고 훔쳐 갔었더라면 싶었다고 한 것,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고 했어요.”
“물론 이해가 되지요.”
“또 있어요. 언젠가 양씨 부인이 새마을호 열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젊은 엄마가 낳은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안고 앞에 앉아 있었대. 그 때가 마침 여름이라서 창문을 열어 두고 있었는데, 이서영 씨는 그 아이가 창문 밖으로 바람에 빨려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대. 이렇게 되면 이건 완전한 질투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지요. 여자의 질투란 원래 무서운 거니까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는 것이 여자의 한 아닙니까?”
한 박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하게 사람을 살리는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참, 한 박사, 어제 두고 간 자동차 말인데‥‥‥”
미안합니다. 어젯밤 좀 취해서 그만‥‥‥ 오늘밤에라도 가지러가죠.“
“그럴 필요는 없고, 오늘 저녁 때 마침 좋은 편이 있지. 대학생 두 사람이 우리 집에 와요. 그 중 한 사람에게 운전시켜 보내도록 하지.”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 고맙고‥‥‥ 오늘도 독수공방 혼자 주무시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아니, 그 대학생이라도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해서요.”
“싱겁긴, 상관없어요. 이 세상에는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고 있으니까 염려 없어.”
“물론 그렇긴 하지만.”
“한 박사도 역시 혼자잖아. 딸 유리는 이야기 상대가 안 되잖아?”
“말씀대로 입니다.”
한 박사는 전화통에 대고 한바탕 껄껄 웃었다.

주말쯤에는 인천의 어머니와 딸 유리를 데리고 온양온천에라도 가볼까 하고 한 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10월 초순쯤이면 아내인 이윤미가 하와이에서 돌아올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다녀오고 싶었다. 대개의 경우 아내들은, 온천이라도 데리고 가겠다면 좋아 하고 따라 나서기 마련인데 한 박사의 아내는 달랐다. 그 달의 점괘에서 방향이 나쁘거나 하면 남편과 딸이 간다고 해도 동행을 꺼려했다. 그것뿐이면 또 좋다. 가족과 함께 행동 못하는 미안함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곧잘 신경질을 부린다. 미안함을 가질 때 상대방에게 서슴없이 사과할 수 있는 자세는 그만큼 사람 됨됨이가 되어 있다는 증거다.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연령이 나이보다 어린 듯싶었다.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에 신경질이나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는 천세풍이라는 의사가 대진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천 의사는 한 박사의 의과대학 후배가 된다. 그는 지금 모교의 부속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큰 키에 핸섬하고 온순한 성격이었다. 상당히 수준 높은 의술을 갖고 있고 그 활달한 성품이 한 박사에게는 한껏 마음에 들었으며, 젊은 간호사들에도 퍽 인기가 있었다. 천 박사는 아직 독신이라서 휴일 당직을 부탁하기에 좋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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