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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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37>
  • 한지윤
  • 승인 2018.08.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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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선생님을 꼭 좀 뵙고 싶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또 낭랑한 음성의 공손한 말씨였다.
“아직 양수는 터지지 않았겠지?”
“네.”
“알았어요. 지금 곧 가지.”
병원 건물까지는 불과 수 미터의 거리였지만 한 박사는 오늘따라 밤바다의 비릿한 내음을 한껏 들이키면서 걸었다.
2층에 있는 분만실 입구에 들어서니 병동담당 간호사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민경이와 화영이가 각기 분주하게 분만기구와 아기 옷을 챙기고 있었다.
“아주머니, 예상대로 분만이 빨라지는군요.”
한 박사는 고무로 된 앞치마를 걸치고 손을 씻으면서 분만대 위에 눈을 감고 얌전하게 누워있는 임산부에게 말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곁에 간호사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한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간호사들에게 눈짓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산부인과 의사란 원래 환자와는 단 두 사람만 있게 되는 기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같이 되어 있다. 한 박사는 이런 불문율을 무시한 것이다.
“선생님이 꼭 전화하라고 해서 조금 전에 딸아이에게 전화했어요.”
“그건 잘 했습니다. 이젠 안심하겠죠.”
“안 그래요. 전 아무래도 여기 있다는 말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오늘은 사정이 있어 집에 갈 수가 없고 내일 아침에는 일찍 가겠다고 해 두었어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아인 지금 시험 중이예요. 그래서 그런지 왜 못 들어 오냐고 따지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어요. 제가 밥도 짓고 도시락도 준비해 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쯤은 고등학교 학생이니 할만 할텐데.”
한 박사는 일상적인 이야기 투로 말했다.

“그래도 딸아이는 무언가 의심하고 있어요. 친척집에 전화를 할 듯 하기에 그렇게 하면 이 엄만 죽어 버린다고 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알 것 아닙니까? 따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납득이 가도록 이야기해 주지요.”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 주셔야 해요……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로 죽여주세요. 선생님이면 주사 한 번으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창호지를 물에 적셔서 갓난애의 입에다 붙이거나 거꾸로 물통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하는 말들이 있었다. 조산원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조산원에게 부탁할 수 없는 집에서는 산모의 언니나 어머니가 그 참혹한 짓을 하면 되었다.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아주머니!”
한 박사는 분명히 잘라 큰 소리로 말했다.
“만일 그런 일을 할 경우 난 경찰서의 철창행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

“지금의 법률에서는 만 6개월까지의 태아는 임신중절을 할 수가 있어요. 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만 7개월까지는 허용되었지만 6개월 아이도 물론 무리지만 7개월 된 아이는 낳자마자 정상아처럼 우는 아이도 있지요. 나도 전에 그런 중절을 한 적은 있어요.
다행히 살아서 나오면 키운다는 조건을 붙여서 중절을 해 주었었지요. 인큐베이터라는 보육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넣어 당분간 정상아로 기르는 거지요.“
“……”
“아주머닌 아이를 낳으면 키울 수가 없다는 거죠? 회사 합숙소에 거주하고 있다면 회사에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하도록 하면……”
“6개월 전부터 슈퍼마켓의 식료품부를 맡고 있어요.”
“오늘은?”
“요사이 슈퍼마켓을 수리하고 있기 때문에 2주정도 휴업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못 키울 것도 없잖습니까? 가게에 데리고 가서 한 쪽 구석에 눕혀두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요.”
“정 그렇다면 양자로 남에게 주도록 하세요. 아이가 필요한 부부가 얼마든지 있어요. 아이 한 명에 희망자는 열 사람쯤 될 걸.”
“선생님, 병원에도 희망해 오는 분이 있어요?”
“글쎄요. 아직 리스트를 만든 적은 없으나 희망한다면 알아봐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아이를 여기에 맡길 수는 없을까요? 내가 낳지 않은 것으로 해두고, 누군가가 낳은 것으로 하고 데려다 키울 분이 없을까요?”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의사가 그런 짓을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법률 위반이라고 해서.”
한 박사는 상대를 달래볼 구실을 또 찾고 있었다.
“아주머니. 남편이 없는데도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곤란한 점이 있어요?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요. 사고방식이 미혼모가 당당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 형편이잖습니까. 아주머니 같은 어른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어색해 할 것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아이 낳은 것을 남이 알면 색안경 쓰고 보게 될 것이고 몰래 양자로 준다고 해도 호적에 기록이 되어서 안돼요..”
“그런 이야기는 뒤에 천천히 하도록 합시다.”
분만진통에는 간헐적인 중단이란 것이 있다. 그 사이에는 통증이 전혀 없어진다는 것은 신의 섭리라고 감탄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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