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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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에
  • 전만성(화가, 갈산고등학교 교사)
  • 승인 2010.01.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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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눈 산. 유화. 162㎝×112㎝. 전만성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수은주는 영하 십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에는 훨씬 더 추울 때도 많았는데, 이만한 걸 가지고 야단법석인가 싶다가도 과연 춥기는 추웠다. 보일러를 한껏 올려도 외풍이 있는지 등이 시려오면서 덮을 것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그동안 얼마나 온화한 겨울을 보냈는가를 실감하는 날씨였다.

그날 밤 서해안에 많게는 10cm까지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이어졌다. 눈이 쌓여 있다면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리라. 작정을 하면서 작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휴교를 했었고, 연락을 늦게 받아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되돌아 왔던 일이 떠올랐다. 눈 속을 달리는 버스 안은 훈훈하고도 여유로웠으며 두런두런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정겨웠었다.

이튿날 아침 눈이 왔다는 핑계도 있겠다, 하루쯤은 차로부터 자유로워져 보자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정류장에는 아직 사람이 나와 있지 않았다. 차 시간을 알아보고 나올 걸 그랬다. 후회했지만 그도 번거로웠을 것이다. 조금 서 있자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금새 웅성거릴 만큼 되었다. 그 중 유독 환한 얼굴이 있어 가까이서 보니 나와 같은 학교로 출근하는 아주머니였다. "추우시죠? 눈 오는 날은 버스가 좋아요." 아주머니가 하얀 입김을 날리며 호호 웃으셨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내가 이런 저런 영수증 사이에 낀 지폐 한 장을 고르는 사이 앞 선 아주머니가 내게 앉기를 권하셨다. 자리 하나 있는 것을 나에게 양보하시는 거였다. 서서 가도 그만인 거리인데다 앉아 갈 생각을 한 건 아니어서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거듭 권하셨다. 그러다가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선생님 오셨는데 양보 좀 해라" 청을 하셨다. 학생들이 쾌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는 지라,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만류를 했지만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쯤에서 학생 하나가 일어나 주면 참 좋으련만 나와 눈이 마주쳐도 누구하나 꿈쩍도 하려 하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자주 화장실에 가겠다, 뭐 좀 빌려 달라, 물 먹고 오겠다. 아쉬운 소리를 잘 하던 아이들이 아는 체도 안하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아주머니가 통사정을 하셨다. "애들아! 선생님 오셨는데 어쩌면 그러니!" 급기야는 아주머니가 나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히셨다. 교육상 그대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앉아 있긴 했어도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주머니는 창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더 이상 자리를 가지고 실랑이를 할 수도 없어 그대로 앉아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꼭 나 혼자서 쇼를 하다 들킨 것 같이 멋쩍고 민망했다. 눈 속을 달리는, 겨울의 낭만에 대한 기대가 확 깨는 출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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