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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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는 날
  • 전만성(화가, 홍성고 교사)
  • 승인 2010.05.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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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부처님오신날. 싸인펜. 30cmX25cm. 전만성.


초등학교 적 친구가 아들 장가를 보낸다고 연락이 와, 정해진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바람을 쐬고 나서 결혼식을 보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때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 온 천지가 연두 빛 물감을 흘려 놓은 듯 연두 빛이 흘러 넘쳤다.

하객도 많았다. 초등학교부터 줄줄이 동창생들에다가 봄나들이 삼아 나온 사람들까지 다른 결혼식보다 두 세배는 많은 것 같았다. 주례사는 아쉽다 싶을 정도로 짧고 간결했다. 오히려 신랑 신부의 자축 놀이가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떼 지어 축가를 부르더니 이번에는 신부가 직접 나서서 노래를 불렀다. 삼절까지 다 부르고도 눈을 감고 감격을 음미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더니 이번에는 키스 쎄러머니. 신랑 신부의 키스는 태연하고도 길었다. 두 사람이 키스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나는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놀이가 귀엽긴 했지만 그걸 즐길 만큼의 아량이 내겐 없었다.

기왕에 왔으니 친구들 얼굴이나 봐야겠다고 로비에서 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 1시 40분에 강의가 있으니 30분 정도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그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다. 나는 지금 결혼식에 와 있고, 여기서 곧바로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학교로 가 있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의 재촉 전화를 받은 것은 학교까지는 20분은 더 가야 할 지점에서 였다. 시계를 보니 1시 45분, 50분부터 강의인줄 알고 있을 테니 재촉을 할만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12시 45분이 아니라 1시 45분을 나타내고 있질 않은가?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20분은 늦을 것이다. 거기다 성미 급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질 않은가? 머리 속이 후끈 뜨거워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뭔가 눈앞을 휙 지나가고 있었다. 과속방지 카메라였다. 벌과금까지? 이러다가 큰일이 나도 나겠다 싶었다. 이미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셈이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운전대를 힘껏 잡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뭐인가! 형체도 불분명한 검은 괴체가 유리창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생나무를 실은 트럭이었다. 한 대만 같아도 빠져 나가보련만 두 대를 지나가기는 목숨을 건 도전이 될 것이었다. 훅, 뜨거운 숨을 한번 토해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리라.'

교실 안은 오히려 단출했다. 바쁜 사람들은 벌써 귀가를 한 모양이었다. 찻물을 담은 물병과 과일접시가 보였다. 그것들에게서 만학도들의 여유가 느껴졌다. 교실 뒤편에서 남자분이 말했다.

"선생님에게 차 한 잔 드리세요." "물이 안 될 걸요?!" 물병을 흔들며 앞자리의 여학생이 대답했다.

"진짜 꼬이네요!" 차를 권한 그 남자분이 그날의 내 운수를 평했다. 이 정도의 꼬임이라면 애교로 봐 줄 수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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