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과 폭력의 트라우마
상태바
고문과 폭력의 트라우마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1.12 11:3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안식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는 파킨슨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으로 고문의 징후를 보여주었지만 그를 고문한 이근안은 ‘내가 했다는 전기고문은 220볼트 전기를 쓴 것이 아니라 손가락만한 AA건전지로 한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지하 고문실에서 발가벗겨져 공포에 휩싸여 있던 김근태는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 점점 길고 강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다. 이때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탔다. ···팔꿈치에는 피딱지가 앉았고, 발뒤꿈치에서는 피고름이 흘렀다’라고 고문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고문하는 자는 고문이 일상의 행위였을 것이고 고문 받는 자는 그 고문이 극도의 공포 속에서 당하는 일이어서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고문의 그림자는 결국 김근태를 놓아주지 않았다.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문과 폭력 그리고 폭언은 무의식 속에 심각한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남긴다. 월남전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냄새, 비명소리가 꿈과 환상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 고통 속에서 어떤 이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어떤 이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트라우마는 그들의 삶을 평생 지배할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쥐 인간’ 사례는 폭언에 의해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밝혔고, 얼마 전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도 아버지의 폭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들이 몇 년 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장애를 겪다 심리치료를 받은 후 간신히 고개를 절반쯤 들 수 있게 된 경우가 방영되기도 했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즐거움을 계속 추구하고 싶어 하는 ‘쾌락원리’와 동시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없애버리려고 해도 자꾸만 나타나 죽음을 향하게 하는 ‘죽음 충동원리’를 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자아심리학은 자아(自我)가 죽음으로 몰고 가는 나를 죽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아가 강하지 못할 때 나는 죽음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김근태의 경우도 그랬을까?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겠지만 고문의 그림자가 늘 따라 다녔을 것이고, 그로 인한 후유증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만 것이 아닐까.

참전자뿐만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 화재현장에서 빠져나온 소방관들에게서도 그 트라우마가 발견되곤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 전쟁터와 엇비슷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요즘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집단 괴롭힘과 폭언, 폭력이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친구들의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을 택한 ㄱ군의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그 아이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라는 유서는 전쟁터의 병사처럼 긴박하게 ¶i기는 공포감을 자아낸다. 이 유서를 보고서야 아들이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니 그의 부모나 학교 선생님은 회한과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평균 2,256시간인 한국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은 세계 1위이고 맞벌이 부부가 외벌이 부부보다 더 많은 현실이다 보니 부모는 아이들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문제를 알아도 잘 대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엄마 아빠가 바쁘니 자식교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아이들은 인터넷 게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어느 지인(知人)의 아들도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어 결국 다른 학교로 전학가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전학 간 학급의 30명 중 10명 이상이 거의 게임중독 상태였다고 한다. 인터넷 게임 때문에 일상생활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요즘 아이를 키워 본 부모는 누구나 동감하는 이야기다. 자살한 ㄱ군의 유서에 ‘게임 캐릭터를 키우라고 협박하고, 게임에 쓰려고 돈까지 가져갔다. 갈수록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때리는 횟수도 늘었다.’라고 쓰고 있다. 친구를 괴롭혀 죽음으로 내몬 학생도 인터넷 게임의 중독자임이 밝혀졌다. 친구들과의 특별한 놀이문화가 없는 청소년들은 인터넷 게임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폭력의 원인으로 발전하고 있다.

학교 폭력이 한국사회의 현안문제로 떠오르고 많은 전문가들은 학교폭력근절을 위한 방안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별 효과 없는 단기적 대응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 폭력이 학교에서 발생하지만 그 뿌리는 가정과 사회에 있음을 알고 사회구조적 차원, 교육시스템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사회가 그 무엇보다 시험 성적을 우선시하고, 학교의 프로그램은 학생을 일류대학에 보내는 것에 고착화되어 있는 한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아이는 그 부모(사회)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나기 때문에 문제의 아이들 뒤에는 늘 문제의 부모(사회)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하여, 학교 폭력은 학부모, 학교, 지역사회, 시민단체, 경찰까지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방안을 수립해야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청소년 시기에는 자기들만의 동질성 확보를 위해 같은 옷과 운동화를 신고 몰려다니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폭력, 폭언이 한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言·行은 먼저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고 나아가 타자에게는 깊은 트라우마를 드리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바지랑대 2012-01-13 14:08:48
모두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기는 폭력, 고문, 폭언이 없는 사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마음에 난 이런저런 생채기를 꺼내어 만져 주고, 보듬어 주고, 함께 울며 아파해 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 부모도, 형제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게 하는 글 감사드립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