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 건립될 노동문학관, 세계 노동문학의 메카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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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 건립될 노동문학관, 세계 노동문학의 메카될 것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0.03.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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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관을 고리로 내년부터 유치하려는 노동예술제가 핵심
후대에 올바른 가치를 전하는 일, 이념·정파의 잣대 판단 말길
홍성의 얼이 나와 노동문학관을 이쪽으로 오게끔 했다고 생각

 

홍성에 국내 최초로 노동문학관이 건립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이자 인천민예총 이사장인 정세훈 이사장이 건립위원장을 맡았다. 정 시인은 오는 4월에 착공해 7월 초 완공을 목표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노동문학관 건립을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이 살던 집을 줄여 건립기금을 조성했다. 그리고 광천읍 월림리 1622 등 두 필지를 매입했다정 시인은 “145평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은 크기이나 노동문학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중앙선이 있는 2차로 도로변이고 버스정류장도 바로 앞에 있다. 길 건너에 넓은 공장 주차장도 있어 행사시에 빌려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동문학관 건립에 한국작가회의, 한국민예총 등 민중예술단체들이 후원에 나섰다. 원로 문인 구중서 평론가, 민 영 시인, 신경림 시인, 염무웅 평론가, 현기영 소설가 등이 상임고문으로, 맹문재 시인, 박일환 시인, 배인석 화가, 서정홍 시인, 임성용 시인, 조기조 시인, 조성웅 시인 등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문단과 예술계 안팎에서 지원하고 있다.

정 시인은 문학관에 전시될 자료는 임화, 김기진, 권환, 박영희, 윤기정 등 일제 강점기 카프문학의 대표주자를 비롯, 산업화 이후 현재까지의 출간된 노동문학 관련 개인 작품집, 그리고 잡지 등이 망라될 것이다라고 밝혔다지난 13일 홍성의 한 커피숍에서 착공 등 노동문학관 건립 준비를 위해 내려온 정 시인을 만나 노동문학관 건립 취지와 진행 상황,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1970~19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자 노동 운동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들이 제법 있다. 가령 구로공단과 가리봉동, 인천 부평공단, 울산공단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런 곳들을 두고 노동문학관 건립지로 홍성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올해 만으로 65세다.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살면서 요령이 생길 것 같았다. 뜻이 있어도 못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삶의 동지인 아내를 설득했다. 만일 집사람이 노후 이야기하고 반대했다면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방한칸으로도 살았던 사람인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라고 했는데, 다행히 흔쾌히 동의해줘 시작할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주변에서 내게 믿음을 줘 가능했다. 그분들이 박수쳐주고 응원해줘서 할 수 있는 일이지, 정세훈의 문학이 뛰어나길 해 그렇다고 많이 배우길 했어?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면 선후배들이 자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료들 없이 어찌 문학관을 짓겠다고 나설 수 있겠나? 그렇게 보내준 자료들로 문학관이 건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고향 홍성의 얼이 노동문학관을 이쪽으로 건립하게끔 만든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동문학관을 이곳에 건립하고자 하는 것, 내가 그런 마음을 갖게 한 것도 결국은 홍성의 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좀 더 들여다보면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같은 위인들의 얼이 나와 문학관을 이쪽으로 오게끔 만든 것이다.

■ 노동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중문학, 저항문학과 어떻게 다른가? 또한 한국 문단에서의 위상은 어떤가?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걸어온 한국사회는 노동자들의 희생 없이 설명할 수 없다. 노동문학은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문학이다. 한국의 노동문학은 일제 강점기 1920∼1930년대에 카프로 대두됐었다. 이후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잠시 끊어졌다가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 단계로 접어든 1970년대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1970년대에는 유신 시절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 투신한 지식인들이 주로 활동했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우리는 살펴야할 것들을 못 살피고 넘어왔다. 비근한 예가 비정규직 문제다. 노동문학은 그렇게 배제된,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한 문제들을 다룬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문학은 공장, 건설현장, 농촌 등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현장에서 무엇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인지를 살피고,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왜 그런지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아우르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점점 인간성이 메말라가고 있다. 극소수만 살아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이다. 현재 비정규직이 대한민국에 천백만명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결혼하면 이천이백만명이 될 것이고 그들이 다시 자녀를 낳는다면 삼천삼백만명이나 되는데, 이런 현실을 예술하는 사람들이 등한시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은 정치권력과 밀접히 연관돼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법이다. 권력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비로소 참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인간의 삶을 앞서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예술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권력과 밀접히 결탁돼 있다는데 있다. 권력과 붙어 같이 갔고, 따라갔다. 이걸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권력의 시녀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대놓고 친일을 했던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데,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문학을 떠받드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친일문학인들과 그 제자들이 문학계 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문학 풍토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학계 내 노동문학의 위상? 사실 노동문학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왜 하필 노동문학인가? 노동문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을 읽고 문학가가 되고 싶었다. 당시 작가는 아니었으나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담임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다. 장곡면 반계초등학교가 내 모교다. 양성중학교 졸업이 나의 정규학력의 전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곧바로 상경해 공장에서 소년노동자의 삶을 살아야했다.

진학을 못하면 문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게 한이 돼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드라마 대본을 썼다. 4개월에 걸쳐 작업했는데 200자 원고지로 1200매 분량이다. KBS방송국에 공모에 참가하기 위해 그걸 들고 광시우체국에 갔다. 더 이상 문학을 못한다는 한풀이였다. 그 원고가 지금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런지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 있다.

문학을 향한 꿈은 그렇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던지 상경해서도 청계천 고서점들을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시간나는대로 그곳에서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진학하려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한용운 선생 등의 시를 접했고 접었던 문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습작을 시작했다. 습작을 하고 창작과비평사에 투고했는데, 그 시들이 나중에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진학을 했어야 했는데, 워낙에 가난하게 살았고, 처자식을 부양해야하는 처지라 결국 검정고시는 포기했다이런 연유로 나는 현재 문학의 계보가 없다. 특별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학연에 얽매이지 않아 좋았다. 문학계에서 눈치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문학할 수가 있었다

■ 노동문학관을 향한 민중예술가들의 기대가 남다른 것 같다.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겠지만 일반 주민들이 노동문학관을 어떻게 활용하기를 원하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야 어떻게든 관리가 가능하겠지만 내 사후가 문제다. 공적영역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후대에 좋은 가치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향후 도나 군과 협의해 그 쪽에서 관리하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할 생각이다.

문학관을 이쪽으로 짓겠다고 할 때 선후배들이 반대를 했다. 노동문학관을 지으려면 구로공단이나 부평공단이나 울산의 공업화 현장 같은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여야지 왜 홍성이냐? 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장소를 타진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쉬울 것 같았는데, 의외로 진행이 어려웠고 벽에 부딪쳤다. 인천시장, 부평구청장도 같은 운동권 출신이고 문학관 건립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건립을 현실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구나 시에서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됐다. 지자체장이 선출직이다보니,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공약조차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비로라도 시작하고, 후에 군이나 도에 사업비를 신청해서 확장해나가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일단 시작하고 그 후에 도나 군에 의미 있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설득해나가는 방법으로 가야할 것 같다. 건축 설계가 들어간 후 김석환 군수를 만났다. 이 사업을 이념이나 정파의 문제로 보지말고 문화적인 가치와 후대와 군민에게 필요한 일인지의 여부를 잣대로 판단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단순히 문학관만 지으려고 하는게 아니다. 문학관을 고리로 내년부터 노동예술제를 매년 유치하려고 한다. 문학관은 이런 예술제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사실 이게 목표다. 예술제를 치루기에 부지 여건이 좋다. 건물이 들어설 부지의 주변 확장이 비교적 용이한 상황이다. 인근 야산에 조각공원을 세울 수도 있고, 시비 공원을 조성할 수도 있다. 문학관 앞에 넓은 마당의 공장이 있는데 필요하면 그곳을 빌려 무대도 설치하고 12일 내지 23일간 캠핑 장소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도 해보고 현재 6년째 인천민예총을 맡고 있다. 민예총 일을 하면서 예술제에 대해 도가 텄다. 내년에 홍성에서 노동예술제가 시작되면 한국에서 처음 선 보이게 되는 것이다.

■ 홍성에서 매년 열리는 노동예술제? 사뭇 기대가 된다. 예술제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고향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홍성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진학을 못하고 일찍 고향을 떠났던 내 심정이 어떻겠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뭔가를 해보고 싶은 꿈을 노동문학관 건립을 통해 이룰 수 있어 좋다. 사실 노동문학관이 성사가 안됐다면, 개인 문학관이라도 지을 생각이 있었다. 문학관을 중심을 노동예술제가 열린다면 풍물과 민중가수들의 흥겨운 축제가 펼쳐질 것이다. 민중미술하는 작가들의 퍼포먼스도 볼 수 있다. 내년에 열릴 노동예술제는 국내 뿐아니라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것이다. 노동예술제가 안착되면 이를 통해 홍성을 알릴 수 있고, 홍성이 세계 노동예술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홍성군민들에겐 문화예술인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건립위원장 정세훈 시인은…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출신이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부평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등과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동시집 ‘공단마을 아이들’ 등을 펴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 故박영근시인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대표), 한국작가회의 이사, 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소년희망센터건립추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천작가회의 자문위원,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추진위원장,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위기청소년의좋은친구어게인 이사, 소년희망센터 운영위원, 인천민예총 이사장, 서해평화포럼 평화인문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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