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홍주 역사에서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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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홍주 역사에서 찾아야
  • 황동환 기자
  • 승인 2020.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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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근·현대사 조명, 예산역사연구소 박성묵 소장
이몽학의 난도 홍주의 보수성 안에서 재조명해야
진정한 보수는 공동체를 안위를 지키는데서 발현

 

홀로 예산역사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향토사학자 박성묵 소장. 박 소장은 지역의 다양한 역사 분야 가운데 특히 근·현대사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그는 요즘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성낙훈·마기상·장식연 등은 최근 그가 발굴해 공적을 조사한 후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정부에 신청한 대표적인 역사 인물들이다. 이 가운데 성낙훈 선생은 지난 1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의 지위를 얻게 됐다. 박 소장이 이뤄냈다. 마기상·장시연 선생 등은 오는 11월이면 독립유공자 반열에 오를지 여부가 결정된다.

박 소장의 고향은 예산이다. 예산에 태어나 성장했다. 고덕초·, 덕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산농전에 진학해 토목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공학도가 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다. 그런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 소장은 만나 지역과 지역 역사에 대해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젊은 시절 토목공학을 전공했던데, 공학도가 역사연구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언제부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나? 그리고 어떻게 역사연구소를 운영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졸업 후 건설업에 종사했지만 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역사와 지리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이미 세계지도를 머리에 그렸다. 또한 그 나이에 세계 각 나라의 수도를 다 외울 정도였다.

고등학교까지는 남들처럼 국정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웠다. 내가 역사공부에 재미를 붙힐 수 있었던 데는 한문을 공부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한문 선생님이 반에서 굳이 나만 시켰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내 번호가 10번이었는데, 그 선생님이 꼭 10번을 시켰다. 나중에 언 듯 물어보긴 했는데, 10이라는 숫자를 좋아해서 그러셨다고 하더라. 그 선생님이 나만 시켰는지지금 돌아보면 그 이상의 다른 뜻이 있는 것도 같고여하튼 그 때 한문을 배웠던 것이 역사공부에도 상당한 도움이 됐다.

예산역사연구소는 2008년에 지역사회 운동하는 지인들과 함께 내가 설립한 연구소다. 연구소 설립을 위해 그 이전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10년간 열심히 돈을 벌고, 그걸 밑천으로 삼아 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이미 세워 놨다. 그러니까 2002년부터 2012년까지 건설업 쪽 일을 하고. 2008년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하던 건설업을 정리했다.

건설업을 하려면 시쳇말로 사기꾼이 돼야 한다. 그 당시만 해도 공무원에게 뇌물 주고 일감을 받곤 하던 것이 업계 풍토였다. 건설업이라는 특성이 그렇다. 그래서 그 일을 오래할 생각은 없었고 더 나이 들기 전에 언젠가 정리할 생각이었다.

연구소 설립에 틈틈이 모아놨던 자료들이 상당한 도움이 됐다. 어느 마을에 공사를 하러 가면 반장에게 일을 맡기고 나는 마을의 역사자료를 수집했다. 마을의 문중사나 예컨대 어느 마을에 창원 황씨들이 산다면 언제부터 정착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이런 자료들이 자꾸 쌓여갔다. 그러면서 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놔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게 됐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소가 설립됐다고 보면 된다.

이런 일의 필요성 때문에 건설업을 2012년에 건설업 면허를 팔고, 현재 연구소가 들어서 있는 이 건물을 지었다. 4층 건물이다. 1층은 연구소로 내가 쓰고, 2층은 학원, 3층은 자택, 4층 원룸으로 사용하고 있다.

연구소를 홀로 운영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연구소 사정은 어떤가? 그리고 향토사학자라 할 수 있겠는데, 주로 어떤 분야가 연구 대상인가?

역사연구소를 체계적으로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진 않았다. 내가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박사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술 세미나에서 나를 찾는 것도 아니다. 이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연구분야가 다른 향토사학자들과 차이가 난다. 나는 근현대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향토사학자들 중에 근 현대사를 다루는 사람이 없다. 나는 예산 지역 근현대사에 집중을 했다. 예산 역사를 보다보면 홍성의 역사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예산지역 근·현대사는 동학을 빼놓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 동학이라는 것은 당시 핍박과 수탈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에겐 큰 희망이자 현실의 질곡을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였다. 죽어라고 농사를 지어도 본인 몫은 고작 20%였다. 간혹 지주를 잘 만나도 30%였던 시절이었다. 백성이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동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운동이자 혁명이다. 동학 이전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본 역사의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다 동학에 와서 비로소 사람을 사람답게 보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민본사상, 인권의식의 싹이 텄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에이브라함 링컨의 노예해방 사건이 있었다. 그 쪽에서는 노예를 해방시켜주던 때, 우리는 어땠나? 사농공상을 거부하고 노비도 인간임을 주장한 사람을 처형시켰다. 이런 것이 차이다.

지난해 일본이 한국에 대해 일방적인 수출제한 조치를 취했다. 일본정부의 이같은 조치에 대체로 미쓰비시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에 반발로 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제품불매운동으로 맞섰다. 과거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의 도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마땅하다고 보는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탈아시아 노선을 걸으면서 조선이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본다과거 우리는 일본제국주의 침략행위로 인한 피해당사국이다. 일제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탈아시아 노선을 걸으면서 조선이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일본은 국가를 신성시하는(국본) 반면 우리는 국가를 선택하는 민족이다. 이런 차이로 우리가 일본보다 정신문화가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에겐 혁명의 역사적 경험이 없다. ‘메이지 혁명이라고 하지 않고 메이지 유신이라고 한다. 그저 뜯어고치기만 했을 뿐이다. 일본에서 민중의 힘으로 뒤집어엎은 역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떤가? 우리 민족은 참다못해 한번 씩 뒤집어엎은 숱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역동성이 있는 민족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권, 민주, 평등 같은 가치들을 정립했다. 홍주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려면 무엇보다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역사를 홍주역사에서 찾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한 사람들을 홍주에서 찾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이 일본을 덜 생각해준다고 하면 항상 호전적으로 나왔다. 대륙에서 일본을 왕따 시킨다는 의식이 있다. 열등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변화를 바란다면 한국이 일본을 너른 마음으로 품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홍성 지역의 보수 성향이 타시·군에 비해 강하다는 평들이 많다. 인근 예산 지역도 비슷해 보이는데, 홍주의 역사와 관련이 있나? 홍성의 강한 보수성의 이유를 어디서 찾을 있겠는가?

문제는 지금의 홍성이 발현하고 있는 보수성이 과연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보수를 진보의 상반된 개념으로 보는데, 사실 보수는 좋은 것이다. 보수라는 것은 사회발전 단계에서 보면 안정적인 힘을 갖고 있다. 왜 예산·홍성 지역의 지배적 의식구조가 흔히 이야기하는 보수성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는가? 이는 홍주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홍주라는 지역은 충청도 서북부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먼 옛날로 치면 하나의 왕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쳐 5백년 이상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해 온 역사 있다. 문제는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발생했다.

이몽학의 난과 동학의 배경도 사실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보수성의 힘이다. 이몽학은 혁명가라 불러야 옳다. 임진왜란 때 왕이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세금을 거둘 마땅한 대상이 없었다. 전란 중에 백성들이 도망가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홍주는 일본의 피해가 적었던 지역이었다. 조정에서 거둔 세금 대부분이 홍주 지역에서 나왔다. 홍주지역에서 왕을 대신해 세금을 거두는 일을 이몽학이 맡았다. 그러던 이몽학은 도망갔다 돌아온 왕을 위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민중을 규합해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역시 홍주라는 공동체의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동학이 대외적으로 내건 기치가 위정척사다. 조정의 부정부패가 심했어도. 홍주는 기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정척사, 다시 말해 기존질서에 위배되는 사악한 세력들을 물리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혁명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홍주는 기존질서에 반해 도전해오는 모든 세력들과 싸워 지켜온 독특한 역사가 있다. 위정척사의 사고로 공동체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홍주성에서 일본과 연합작전을 폈다. 그렇게 해서 국가의 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구에 일본의 실체를 알게됐다

동학은 일본도 위정척사의 대상임을 깨닫고 일본 세력을 물리쳐야한다는 자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렇게 의병이 됐다. 남들이 가만히 있을 때 홍주는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다이몽학의 난을 평정했던 임득의 장군, 패자 이몽학도 모두 홍주의 보수성 안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주로 승자의 기록이 역사에 남다보니 패자는 배제됐다. 홍주를 승자의 역사로만 채우면 반쪽짜리 밖에 안된다. 이몽학 역시 다른 방식으로 홍주를 지키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몽학은 배제하고 임득의 장군만 선양하면 홍주가 지닌 보수의 절반을 잃는 셈이다.

기존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측면에서 보수가 지닌 가치는 납득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성의 발현이 혈서로 견마지로를 써내려가며 일본 천황에게 충성맹세를 한 만주국 장교 박정희의 딸을 국가지도자로 뽑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문제 있는 것 아닌가? 홍주의 보수성은 어떤 방향으로 살려가야 한다고 보는가?

보수를 표방한다고 해서 전부 용인할 수는 없다. 합리적인 보수가 있는 반면 수구 보수가 있다. 탄핵당한 박근혜를 인정하는 순간 보수는 본령에서 이탈한 것이다. 보수에 대한 관점이 프랑스와 비교해 차이가 크다. 문재인 정부를 좌파정부로 규정하는 세력들이 있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문재인 정부를 그대로 프랑스에 옮겨놓으면 중도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굳이 말한다면 온건한 우파 정도에 해당할 뿐이다.

홍주의 주체들이 역사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보수 이전에 좌파역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승자의 역사도 있지만 패자의 역사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몽학 같은 역사의 패자도 사실은 홍주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질서가 무너질 위기에 감수성을 갖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가는 보수여야 한다.

친일을 뿌리로 군부독재를 거쳐 온 세력들이 의회권력의 한복판에 똬리를 트고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정권유지를 위해 분단체제를 이용하는 세력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분단체제를 이용한 세력들이다.

분단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의 책임도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분단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식민통치를 당한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식민통치를 용인해준 국가가 미국이다우리도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나 주인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내 땅 내 힘으로 지기겠다는 작전통제권환수에 사시나무 떨 듯 겁내는 세력에게 어떻게 공동체 안위를 맡길 수 있겠는가?

분단이후 독하게 전쟁까지 치룬 남북한의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민족은 피로 엮인 관계다. 부자지간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민족문제 해결없이 공동체의 안위도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반통일세력을 두고 보수라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민족공동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기득권 챙기기에 혈안이 돼 있는 세력을 어찌 보수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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