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에피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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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에피퍼니?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4.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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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요즘이야말로 전 인류의 에피퍼니 아닐까요?
선배: 어떤 에피퍼니?
후배: 선배님, 광고 찍으세요? 어떤 에피퍼니? 어떤 소주?

그렇게 선후배는 홍성과 서울이라는 충분한 ‘거리두기’를 하고 여러가지 뜻을 지닌 ‘에피퍼니’를 놓고 동문서답하며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감과 우울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에피퍼니하면 우선 아기예수의 탄생과 세 명의 동바박사들이 연상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경배하는 축제와 관련된 단어이다. 천문과 점성의 대가였던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지닌 채,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향했다는데……

몰약은 올리브 나무과에 속하는 관목으로,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서식한다. 예부터 방향제와 방부제로 쓰였고, 방광, 자궁의 분비과다를 막아주고 구강소독 및 잇속이나 목구멍의 세균을 죽이는 한편, 위장에 좋고 염증치료로 쓰인다. 유향은 크고 작은 종기, 부스럼에 효험이 있고 복통 따위에도 잘 듣는 약으로 알려졌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때가 기원 전 4년쯤으로 칠 때 2000여 년 전의 의학수준이 놀랍다. 동방박사들이 먼 동방쪽에서 이스라엘 베들레헴까지 가는 데 12일을 걸렸던가보다. 그러기에 서주에서는 아기예수가 태어난 크리스마스 말부터 12일 째가 되는 1월 6일까지를 축제로 즐겼고, 특히 1월 6일 전야에 성대한 축연을 벌인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에도 ‘십이야’라는 걸작이 있다. 내용은 에피파니(예수공현일)와 직접 연관은 없으나 위대한 인물의 탄신을 경하하며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는 유쾌한 극이다. ‘에피퍼니’의 또 다른 의미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나 예리한 통찰력이 생기는 장면을 말한다. 요컨대, 극 전개상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곳이다. 인간은 특별히 아끼는 물건이나 믿는 사람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런 일을 겪은 후, 해당 인물은 인생이나 인간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그로 인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이번의 코로나19 사태를 보며 ‘인류를 위한 에피퍼니’라고 느낀 사람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갑자기 오스발트 슈팽글러의 역저 ‘서구의 몰락’이 떠오른다. 1880년 북부 독일 하르츠 지방의 유편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해 밤에도 자주 흐느껴 우는 바람에 여동생들이 그 소리로 인해 자다가 깨어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역사를 발전시켜온 주체가 자기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차있던 서구인들에게 서양은 몰락하고 말리라는 예언적인 역사관을 제시함으로써 동시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는 인류 역사를 폭넓게 바라볼 것과 역사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순환을 하기 마련이라는 놀라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당대 지성인들을 각성시켰다. 고교에서는 수학, 자연과학, 역사, 독일어를 가르치다가 31세에 퇴직을 한 뒤, 살기 좋은 남부 뮌헨으로 이사해 저술에 매달리며 독신으로 살다가 56세에 눈을 감은 도스토옙스키의 애독자 오스발트 슈팽글러.

코로나19로 인해 인류 전체가 전전긍긍하며 허둥대는 작금의 혼란상을 볼 때 그의 선견지명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다가올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의 편리만을 생각하는 인간들의 행태와 이에 비례해 전염병의 주기와 강도가 갈수록 예측불허로 치닫으리라는 점이다. 인류는 이제 되 닫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안고 일생을 허둥대며 살게 생겼다. 이번 사태가 인류를 공멸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는 에피파니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이원기<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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