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입문 53년, 국회의원 4선의 꿈 이룬 정치인 홍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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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입문 53년, 국회의원 4선의 꿈 이룬 정치인 홍문표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0.04.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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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유진오 박사 강의매료, 1967년 선거운동원 참여
제12대 이재형 국회의장 의전·정무수석비서관, 정치 결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선거 홍성·청양에 첫 무소속 출마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선거에 첫 당선, 4전 5기의 뚝심
미래통합당 홍문표 국회의원의 후보 당시 선거 유세 모습.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동곡부락 94번지,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1947년 10월 5일에 태어난 홍문표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오봉산 밑에서 자랐다. 다섯 봉오리가 나란히 있는 산이어서 ‘오봉산’이라 불리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의 정기가 남달라 작은 마을인데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난다고들 말한다. 사실 오봉산 자락의 마을에서는 이현재 전 국무총리, 유태흥 전 대법원장, 조부영 전 국회부의장뿐만 아니라 홍문표 의원의 집안 동생인 현재 미래통합당 국회의원인 홍일표·이표 형제판사 등 오봉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서울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꽤 있는 동네다.

홍문표는 중학교시절 태권도 2단에 대대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해 농사짓는 일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렇다보니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멀리 보내지 않고 자식들을 끼고 살면서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싶어 하던 시절, 홍문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170㎝가 넘을 정도로 큰 홍문표가 건실한 농사꾼으로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는 심정을 알면서도 상경을 꿈꾸게 된다. 1962년 광흥중학교를 졸업한 홍문표는 홍동에서 농사일을 하던 부모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을 뒤로하고 더 넓고 큰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상경을 결행한다. 아버지의 서류함에서 5000원짜리 몇 장을 집어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탔던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홍문표는 강북구 삼양동에서 매일 새벽 신문배달을 하면서 물지게를 지고 물을 배달했으며, 밤에는 청산학원에서 입시준비를 해 1964년 한영고등학교 야간반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태권도 사범을 하면서 돈을 벌어 1967년 건국대학교 농화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건국대 농화학과에는 홍성출신의 주현규라는 교수도 있었다. 홍문표는 대학시절 용산 미8군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으로 활동하며 돈을 벌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1967년 유진오 박사 선거운동원으로 ‘정계 입문’해
홍문표의 대학시절은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로 1964~1965년에 있었던 한일협정반대운동시위, 1968~1969년에 있었던 3선 개헌반대투쟁 등을 통해 대학생들의 저항이 계속됐다. 4·19로 시발된 저항운동은 부정부패와 불의에 대한 사회문제와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였다. 이 당시 고려대학교 유진오 박사의 철학특강이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법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유진오 박사의 특강은 대학생 홍문표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농과대학생이던 홍문표에게 사회문제부터 철학까지 망라하는 유 박사의 강의는 충격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고려대 앞에 있던 막걸리촌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을 이어나가면서 유진오 박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 대표위원이 된 유진오 박사가 국회의원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하게 되자 홍문표는 대학교 1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유진오 박사의 선거운동원이 돼 선거를 돕는다. 이 당시 신민당 조직국장이었던 박철용이 홍문표를 유심히 보고 체격도 좋고 하니 ‘정치를 하면 큰 사람이 되겠다’고 조언했다. 권투를 했던 박철용은 한국체육관에서부터 홍문표를 보아왔던 터라 유진오 박사가 정치를 하려면 조직이 필요했던 시기여서 신민당 청년부장을 맡는다. 이후 홍문표는 조직부장을 거쳐 청년부국장, 나중에는 국장까지 승진한다.
홍문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군대까지 미루면서 현실정치에 몸을 담았다. 홍문표는 신민당 정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신민당 당보였던 ‘민주전선’에 당시 박정희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독하게’ 썼다. 홍문표는 대학졸업 후 2~3년 동안 이렇게 신민당원으로 정치에 몸을 담고 정당생활을 했다. 이후 보충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신민당으로 다시 돌아가 청년당원들을 훈련시키는 훈련원에서 일을 했다. 당시 신민당 훈련원장은 예산출신인 한건수 의원이 맡고 있었다.

홍문표가 구체적으로 ‘국회의원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제12대 국회의장인 이재형 의장의 의전비서관을 맡으면서다. 1984~1985년경 이재형 의장을 만나게 되는데, 경기도 안양출신인 이재형 의장이 6·25때 홍성으로 피난을 왔을 당시 홍 의원의 할아버지와 이재형 의장 간의 오랜 인연의 덕에 이재형 국회의장의 4급 의전비서관으로 일하게 되면서다. 이후 홍문표는 1급 정무수석비서관까지 지내는데, 이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위해 국회의원이 돼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결심을 하고 출마를 준비한다.

■ 1988년 첫 무소속으로 출마해 2004년 17대 국회의원 당선‘4전5기’신화 이뤄
홍문표는 1988년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청양·홍성 지역에 처음으로 출마한다. 그러나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길이 아니었다.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이라는 뼈아픈 첫 경험을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첫 경험이라는 것은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그만큼 현실정치의 벽을 너무나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홍문표의 첫 국회의원 당선은 2004년 실시된 제17대 총선이었다. 처음 출사표를 던진 지 무려 16년 만의 ‘4전5기’다.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 ‘내각제개헌’을 조건으로 ‘구국의 결단’이란 명분을 내세우며 ‘3당 합당’을 결행한다. 이때 홍문표는 이기택 총제와 함께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장석화, 박계동, 김광일, 장기욱, 노무현, 김정길, 박찬종, 이철 등과 1990년 6월 15일 ‘꼬마민주당’을 탄생시키고 참여한다. 하지만 꼬마민주당은 1991년 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하자 야권통합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해 9월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이기택·김대중 공동대표 체제를 구축 ‘통합민주당’을 탄생시킨다. 이때 홍문표는 남궁진 총무부총장과 조직부총장을 맡아 전국 조직을 총괄했다. 이 당시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김대중이 나갔지만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난다.

홍문표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 제13대 총선서 신민주공화당으로 당선돼 3당 합당으로 민자당으로 옮긴 조부영에게 패해 두 번째 낙선을 한다.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민주당으로 출마한 홍문표는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이완구에게 패해 세 번째 낙선을 한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을 선언해 한나라당으로 바뀌자, 홍문표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 이후 홍문표는 조직담당 부총장만 4년 넘게 맡으며 이회창 전 총리의 대선준비를 돕는다.

그리고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자유민주연합 이완구에게 패해 네 번째로 낙선한다. 이합집산에 휩쓸리지 않고 지역구를 지켜온 홍문표는 드디어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야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한다. 1967년 유진오 박사의 선거운동원으로 정치를 시작한지 37년만의 일이며, 이로써 ‘4전 5기의 신화’를 만들어 낸 주인공이 된다. 당시 한나라당으로선 탄핵 역풍이 불던 시기에 일궈낸 의미 있는 승리였다. 제17대 국회에서 홍문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농어업대책특위를 맡기도 했다. 또 유일한 충청권 한나라당 의원으로 ‘태안유류오염사고 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협상을 이끌었다. 2007년 1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위원회 인수위원으로 활동했다. 

2008년 총선에서는 정치적 사부인 이회창이 ‘차떼기정당’사건으로 한나라당에서 탈당, 자유선진당을 만들어 홍문표의 지역구인 홍성·예산에서 제18대 총선에 출마했다. 이회창은 홍문표 영입을 꾀했으나 홍문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때문에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선진당 이회창에게 패해 낙선했다. 제18대 총선에서 낙선한 홍문표는 2008년 한국농어촌공사 제5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농어민을 위한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에서다. 그렇게 어렵게 단 배지를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잃었지만 홍문표는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화려하게 여의도에 입성한다. 이어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돼 3선 중진의원으로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이번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돼 4선 국회의원으로서의 꿈을 성취한 만큼 앞으로의 의정활동과 충남도청소재지인 홍성·예산의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홍문표 프로필
 △충남 홍성 홍동출신 △한영고 △건국대 농화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회의장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한나라당 사무부총장 △제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충남도당 위원장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간사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위원회 인수위원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대한하키협회 회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9대 국회의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제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제20대 국회의원(3선),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현) △제21대 국회의원 당선(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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