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날들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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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날들의 끝에서
  • 김창호 홍성조류탐사과학관 연구위원
  • 승인 2020.04.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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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한 세상 건너가는 일이 결코 녹록치가 않다. 모든 생명체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인간은 어느 순간, 힘도 없이, 희망도 없이, 돈도 없이, 그저 살아가야 하는 무력한 인생의 시기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당신의 아버지, 당신의 어머니가 그랬으며, 살아있고 사랑하는 당신 또한 그러한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순명, 겸손, 기도, 감사, 청빈을 추구한 중세 수도사들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는 선연한 서약과 지혜가 한층 새삼스럽다. 인생기하(人生幾何)-짧은 인생 길어야 얼마나 되나. 이제 살아갈 날들이 얼마 남아 않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면 누구나 스스로를 조용히 돌이켜 보게 된다.

침잠하는 지는 해, 저녁노을을 고요히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대의 수중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있는가. 탕진한 영혼의 후회와 비통한 기억뿐. 인간은 때로 기쁨에서 태어나 슬픔으로 돌아가고 저녁의 방탕한 쾌락은 아침의 참담한 비애를 불러온다. 

못난 자식이 선산 지킨다는데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산 그대는 돌아온 탕자(蕩子)도 되지 못했으리라. 무엇보다도 좋은 인간이 아니었고, 많은 잘못과 너무나 큰 허물들이 있었다. 살면서 지은 죄들은 너무도 무겁고 깊었다. 부모에게는 참으로 불효했다. 아이들에게는 모범이 되지 못했다. 많은 인생사에서 작은 이익에 집착해 매섭게 따지고, 큰 의리를 외면하는 아주 비겁한 선택들을 자주 했다. 선이나 미덕은 키우지 못하고 이기적인 죄와 악덕들을 예사로 반복했다. 내 인생을 스쳐간 아름다운 여인들이나 옥골선풍의 인품이 높은 벗들에게 엎드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빛났어야 할 그들 인생의 향방을 아연 불행으로 바꾸고 오도한 죄는 죽음으로서도 씻을 수 없는 과오다. 아마 저승이나 지옥에 가서도 도무지 갚지 못할 것이다.  

화향천리행, 인덕만년훈. 꽃향기는 천리를 가고 대인군자의 훈훈한 덕망은 만년동안 남는다고 했으나 한 때의 인연이나 우연한 행운의 덕분으로 꽃은 잠시 피웠을지 모르나 열매는 매우 부실했다. 지나온 인생의 궤적은 내내 화실불겸(花實不兼), 외화내빈의 껍데기가 아니었던가.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 것은 대체로 좋아했으나 공부가 부족해 볼만한 문장이나 남기고 싶은 글이나 책이 없다. 성공하고 출중한 인물들이나 문집이나 저서를 남기야지 보잘 것 없는 시시한 인물이 무슨 저술을 남기겠는가. 학창시절부터 좋은 친구나 훌륭한 스승들은 즐비했으나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실망을 크게 주었다. 어린 시절 존경하는 국어선생님께서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글귀를 좌우명으로 주신 일이 있었으나, 못난 제자는 재능이 졸렬하고 천박한 인품으로 그런 그릇이 되지 못했다. 어릴 때는 신동(神童)이 아니었고, 젊은 시절에는 호연지기를 가진 사나이가 아니었고, 벼슬에 뜻을 잃은 현자(賢者)도 아니었다.

늙어서도 신선(神仙)은커녕 속물(俗物)을 면치 못한다. 오늘날 소인배가 된 것은 모두가 스스로가 만든 자업자득이다. 결국 술항아리나 밥통이 된다는 주옹반낭(酒甕飯囊), 걸어 다니는 시체나 뛰어다니는 고기 덩어리라는 행시주육(行尸走肉)의 뼈저린 자탄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은 득의의 나날을 보내는 친구들과 아예 연락을 끊고 살아야 할 처참한 처지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서로 형편이나 위치가 비슷해야 어울리게 되는 것이지 너무 큰 차이가 나면 가까운 벗도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을 닫아걸고 은둔하면서 교정(交情)이나 염량세태를 탓할 것이 없다. 

평생의 생업으로 제조업이나 사업에 과감히 투신하지 못하고, 부(富)를 이루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 대부분이 재물의 다과에 의존하고 돈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일진대, 이재(理財)의 재주가 없어 부자(富者)가 되지 못해 살아가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나 적선을 하지 못했다. 군자는 재물로 예(禮)를 표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지인들의 애경사에 부의금이나 축의금을 넉넉하게 쾌척하지 못하는 군색한 형편을 어찌 발명이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황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고, 부귀영화를 발아래 짓밟고, 권력과 출세를 냉소하며, 굽은 일을 하며 오래 사는 것보다, 옳은 일을 하며 죽어야 할 때 제대로 죽는 것이, 대장부의 장한 뜻이라고 하지만 영웅호걸이 아닌 우리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한없이 젊은 날, 가슴 두근거리며 읽던 막스 뮐러(1823~1900)의 ‘독일인의 사랑’에서 하나의 어설픈 자기위안을 얻는다. “어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도,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마치 먼지가 많고 단조로운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한 시기가 있는 법이다. 그 시기의 회상이라고 하면 다만 자기가 먼 길을 걸어왔고 나이 들었다는 쓸쓸한 감정밖에 다른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인생이라는 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같은 강이며, 다만 양쪽 강변의 풍경이 옮겨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다가 인생의 폭포에 이르게 된다…”
 

김창호<홍성조류탐사과학관 연구위원·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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