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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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벗어나기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1.07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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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이러저러한 삶이 가치 있다고 설명해 주는 반면, 문학은 일그러지고, 깨지고, 깊은 심연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파탄된 삶을 연민의 눈빛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저렇게 살면 되겠느냐는 회의적 질문도 던진다. 특히 소설은 인간의 한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보여준다. F.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한 인간의 일그러진 사랑을 끝까지 따라간다.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국가라는 기능이 방기(放棄)됐을 때, 작은 공간에서 인간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역겹게 그려낸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은 독자의 정서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불편한 심정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사람들을 눈멀게 하는 역병이 도시에 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도 없다. 눈  멀기 전에 살아가던 모습이 그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어떤 사내가 처음 눈먼 자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친절을 베풀다가, 눈먼 자의 자동차를 훔쳐 달아난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도둑’이다. 장관, 국회의원 등의 명칭보다 익명성이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다. 명칭 뒤에 숨어 못된 짓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급하게 역병이 퍼져가는 이 도시에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 먼 자들을 임시 수용소에 감금하고 그들에게 식량을 넣어주는 일 뿐이다. 무장한 군인들은 전염병에 걸린 자들이 탈출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그 속에서도 눈먼 자들은 역경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금전과 식량 갈취, 강간과 살인, 성상납 같은 짓을 반복한다. 눈 떠 있을 때와 다르지 않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권력은 형성되며, 권력을 쥔 자는 타자를 무자비하게 강제한다.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인간의 본능이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들이 자신의 자유와 재산,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십시일반 세금을 내어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국가가 오히려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구치소, 요양원 등을 국가가 잘 관리하지 못할 때 역병이 확산돼 국가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 변화는 지구촌의 일상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치과의사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하며, 커피도 ‘테이크 아웃’해 들고 마셔야 한다. 4명 이상은 식당에서 함께 밥 먹고 담소도 나눌 수 없다. 언제 이 상황이 끝날 것인가를 고대해 보지만, 면역학계 권위자 마크 월포트는 ‘코로나 19’의 완전한 종식이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설령 이 상황이 끝난다하더라도 우리의 변화된 삶은 ‘코로나19’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역경을 통과하면서 그 이전과 다른 삶을 찾아내 왔다. 중세시대의 페스트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낳는 동인이 됐고, ‘코로나 19’는 새로운 생활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 규범이 필요하다. 소비의 행태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고, 기존의 교육방법 외에 ‘플립 러닝’, ‘블렌디드 러닝’ 등이 보편적 교수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캠퍼스도 없는 ‘미네르바 대학’은 하버드 대학보다 입학이 어려운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언택트 untact’ 교육방법에 활로를 열어주고 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태의 모습으로 코골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정치권일 것이다. 정치꾼들은 대립과 분열을 통해서라도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적폐청산이라며 과거를 깨끗이 정리한다지만 적폐에 적폐를 쌓아갈 뿐이다. 검찰총장을 찍어내려는 정치적, 법률적 행위가 사법부에 의해 완패를 당했음에도 오기에 찬 정권은 제2탄의 플랜을 준비한다. 오기와 오만과 오판의 결정판이다. 국회의원 수만 많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오판을 할까봐 미국은 처음부터 국회를 상·하원으로 분리했다. 대통령제를 만들어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입법, 사법, 행정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갖추도록 헌법을 설계했다. 《연방주의자 논설》은 이들의 고뇌를 웅변한다. 그러나 균형을 깬 독재 권력이 잠시 정권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세월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독재가 지속되면 스윙보터인 중도파가 이탈하고 정권의 몰락은 시작됐다. 미국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도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정치권은 상대를 경쟁자로 인정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하며, 권력의 힘으로 편파적 이득을 취하려는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아비규환을 종식하는 길은 적대감과 강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 연대(連帶)라고 작가는 말한다. 요원해 보이지만 새해에 우리 사회가 이런 길로 나아가길 소망해 본다.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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